고구려 용면(龍面)은 지금 소개하는 와당의 문양에서 완성을 이룬 듯하다. 강인한 민족성을 대변하듯 가장 날카롭게 구성돼 있다. 수줍게 미소를 짓는 치우의 얼굴에서 어느 덧 강한 도깨비 같은 형상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 같은 와당의 출현은 대륙으로 크게 영토를 넓혀갔던 고구려 최고의 융성기였던 4세기 후반~5세기의 소작으로 생각된다. 광개토대왕(재위 391∼412)릉 주변에서 찾아진 용면와당은 직경이 20여㎝가 넘는 것도 있다. 와당의 크기를 감안하면 당시 건물의 서까래가 얼마나 컸나를 짐작 할 수 있다. 이 같은 모양의 와당은 평양 천도 이후에도 많이 사용됐다.
이 같은 용면은 신라, 백제에 전달되고 신라에서 가장 훌륭한 용문이 완성 된다. 경주 왕궁지나 황룡사지, 황복사지, 고선사지 등 유적에서 출토되는 망와(望瓦)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백제 왕궁지나 절터에서는 용문 와당의 극소수로 발견된다. 필자는 35년전 백제 사찰 유적인 금강사지(金剛寺址)를 답사한 적이 있는데 백제기와에 용면을 장식한 사례는 발견하지 못하고 통일신라, 고려시대 암막새에서 장식한 것을 수습한 적이 있다.
백제인들이 날카로운 인상의 용문보다는 부드럽고 온화한 연화문을 선호한 때문인가. 고구려는 망와가 아니더라도 가장 많은 용문 기와를 만들어 옥개를 장식한 반면, 신라, 백제는 한 동의 건축물에 네 모서리에 망와로만 장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용문 와당 유물이 귀한 것이다.
이 막새를 보면 이마에는 삼산형(三山形)의 뿔이 다섯 개로 늘어났다. 흡사 왕관을 보는 듯하다. 코는 들창코로 위에는 두 개의 주름이 있고 위에 삼산형의 장식을 두었다. 눈썹은 양 위로 치켜져 올라가 있고 눈은 일월도(日月刀) 같이 날카롭게 위로 올라가 있다.
안구는 1조의 선각 원문으로 표현했다. 코는 들창코로 크게 표현돼 있다. 입은 옆으로 길게 벌렸는데 이는 송곳니를 포함 위에 6개, 아래 6개로 표현했다. 입가에는 수염이 양 옆으로 뻗어있다. 와당의 외구에는 1조의 원형으로 선문대가 마련돼 조형미를 보여 준다. 태토가 비교적 곱고 모래가 적으며 적색이다. 수키와 안쪽에는 직포의 흔적이 남아있다. 경 15.5㎝, 주연 폭 1.2㎝, 두께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