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와 함영훈 화가가 함께 떠나는 스포츠 in 열정- 이승엽]
“아직까지 이승엽이 죽지 않았단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 이승엽 ⓒ천지일보(뉴스천지)

◆ 베이브 루스와 닮은꼴 이승엽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투수 이승엽은 팔꿈치 수술 부위가 나을 때까지 잠시만 타자를 하기로 했던 것이 좋은 성적을 냈고, 대표적인 토종 홈런타자로 자리 잡았다.

프로 5년차인 1999년에 그는 5월 월간 최다홈런(15개), 8월 최연소 100개 홈런(만 22세 8개월), 홈런신기록(54개)을 세우는 등 최고의 해를 보내면서 국민타자가 됐다. 당시 그가 홈런 신기록을 경신할 때마다 그 공을 잡기 위해 국내 야구장에 처음 잠자리채가 등장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때는 무서울 게 없었다. 마음먹은 대로 다 됐기 때문에 그 누구도 부러울 것이 없었던 한 해”였지만 한편으로는 “야구는 단체 스포츠인데 나한테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돼서 다른 선수들에게 피해를 준 것 같다. 특히 선배들이 피해를 많이 보셨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승엽에게서 역시 남다른 배려심이 느껴졌다.

이같이 고교 때 최정상급 투수로 활약하다 갑자기 찾아온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타자로 전향해 대성공을 거둔 이승엽은 마치 메이저리그 전설적인 홈런타자 베이브 루스를 연상케 한다.

베이브 루스 역시 방어율 2.25로 100승에 가까운(94승 46패) 승리를 거둔 최정상급 투수였다가 타격자질을 인정받고 전향해 최고의 홈런타자가 됐다. 다만 이승엽은 부상으로 전향했지만 루스와 매우 닮은꼴이다.

◆ 국민적 영웅 등극

2000년 박경완에게 홈런왕 타이틀을 잠시 내준 이승엽은 이듬해 2년 만에 되찾은 이후 2003년 홈런신기록을 달성하고 일본에 진출하기 전까지 한 번도 빼앗기지 않고 정상을 지켰다.

특히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이승엽은 9회말 극적인 3점 동점홈런을 쳤고, 마해영의 끝내기 홈런으로 생애 첫 한국시리즈 우승의 기쁨을 맛봤다.

삼성 역시 창단 후 첫 우승이었다. 당시 기분에 대해 이승엽은 “너무 기뻤기 때문인지 울기도 했는데, 신인 때부터 8년 동안 기다린 우승이었지만 갑자기 1게임으로 결정이 나니 다음 목표를 잃은 듯해 만감이 교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승엽에겐 다음 시즌 또다른 목표가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마음을 추스르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프로였다. 해외진출 자격을 얻을 수 있는 마지막 시즌 그의 목표는 아시아 최다홈런 신기록이었던 것.

2003년 6월 이승엽은 알렉스 로드리게스(뉴욕 양키스)보다도 앞선 세계 최연소 300홈런의 대기록을 수립했으며, 시즌 마지막 경기인 10월 2일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홈런을 때려 극적으로 아시아 신기록인 56홈런을 달성하게 된다.

또한 이승엽은 국내야구 뿐 아니라 국제대회에서도 극적 홈런을 때려내며 진가를 발휘해 국민적 영웅이 된다.

▲ 이승엽 ⓒ천지일보(뉴스천지)
2006년 WBC 아시아 예선전에서 일본에게 1점차로 뒤지고 있던 8회 역전 투런 홈런을 때려 일본야구의 심장인 도쿄돔을 강타하며 승리를 이끌었고, 베이징올림픽 준결승에서도 2-2이던 8회 최고 마무리투수였던 이와세로부터 투런 홈런을 뽑아내 한일전 승리를 이끈 것이 대표적이다.

특히 유독 일본전에 강한 것에 대해 “팀이 아니라 한국을 대표해서 나온 것이고 한일전은 민감하고 이겨야 한국의 사기가 올라가기 때문에 반드시 이기려고 했던 것”이라며 “미묘한 대립감정이 있어서 늘 한일전은 마음고생이 심했고, 힘들다”고 털어놨다. 이제는 일본과 국가대항전만은 살짝 피하고 싶은 듯한 눈치다.

또 그가 일본에 진출하면서 가지고 있었던 최다홈런 기록은 선배 양준혁이 가져가게 됐고, 모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이승엽이 없어서 가능했다’는 말을 한 을 두고 이승엽은 “일본과 한국 성적을 합해서는 내가 1위”라며 농담조로 응수했다.

또한 이승엽은 방송인 김제동과는 막역한 사이로 잘 알려져 있는데, 김제동이 가끔 방송에 나와 자신의 성대모사를 하는 것에 대해선 “하나도 안 똑같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 행복과 시련을 오가며 더욱 성장

2003년 시즌을 마친 뒤 이승엽은 메이저리그가 아닌 지바롯데와 계약하며 일본 진출을 택하게 된다.

당시 기자회견에서 이승엽은 많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그는 “많은 사람들이 내가 메이저리그를 못가서 눈물을 흘렸다고 아직도 오해를 하고 있고, 몇 번을 이야기해도 부각이 안 된다”며 “28년간 대구를 떠난 적이 없었고, 부모님과 친아들같이 아껴준 삼성을 떠난다는 생각에 미안함 때문에 울컥 했던 것”이라 해명했다.

그는 “언젠가 한국으로 복귀한다면 삼성 라이온즈로 돌아오고 싶다”고 할 정도로 삼성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

헤어짐의 아픔을 뒤로 한 채 일본 진출이란 새로운 도전에 나선 이승엽은 파격적인 연봉을 받고 지바롯데에 입단했고, 개막전에서 홈런을 때리며 일본에서도 홈런왕에 등극해 성공신화를 쓸 것이란 전망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승엽에게 시련은 빠른 시간 찾아왔다.

그해 2번이나 2군 강등을 당하는 굴욕을 겪었고, 2005년 개막전에선 엔트리에도 제외된 것. 최고까지 올랐다가 프로생활 이래 처음 추락을 맛본 이승엽은 “당시 외로움까지 느껴 삼성에 있었으면 편하게 살았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등 후회가 들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역시 프로였다.

“한국에 있었으면 2군 생활의 힘든 문제점을 몰랐을 것이다. 2군 생활을 통해 오히려 인생에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며 위기를 좋은 기회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2005년 이승엽은 발렌타인 감독이 플래툰 시스템을 쓴 탓에 들쑥날쑥한 출전에도 불구 시즌 30홈런을 때리며 부활했고, 일본시리즈에선 3홈런을 터트려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이름값을 하게 된다.

◆ 계속된 연단에 독한 마음까지

이승엽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오로지 출장기회를 보장받기 위해 한국 선수들의 무덤이라 불리던 요미우리로 이적하게 된다.

요미우리는 아마추어 시절 박찬호와 함께 최고의 투수로 군림하던 조성민을 비롯해 국내 내로라하는 정민철, 정민태 등의 투수들이 입단했지만 빛을 아예 보지 못했을 정도로 한국 선수들에겐 그야말로 독이었던 팀.

그 때문에 이승엽 역시 주변의 큰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 요미우리행을 택했고, WBC에서의 맹활약으로 개막전 4번타자로 나선 것을 시작으로 요미우리의 역대 70번째 4번타자로 활약하게 된다.

하라 감독의 남다른 애정 아래 이승엽은 승승장구하며 일본에서 첫 홈런왕을 눈앞에 뒀지만, 시즌 후반 무릎이 좋지 않아 고전하다가 우즈에게 홈런왕을 내주고 만다. 그나마 41홈런과 .323의 좋은 타격 성적을 거둔 이승엽은 요미우리와 역대 최고 금액으로 4년 장기 계약을 맺는 대박을 터트렸다.

하지만 손가락 부상이 그의 발목을 붙잡게 된다. 2006년 무릎 수술을 마친 데 이어 2007년 시즌 중 손가락 부상을 당한 상황에서도 분투하며 팀을 센트럴리그 우승으로 이끈 이승엽은 시즌이 끝난 뒤 수술을 받으며 극심한 타격 슬럼프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에 이승엽은 4번타자에서 6번, 심지어는 8번타자까지 내려가는 등 또다시 굴욕을 겪었다. “프로는 실력으로 보여줘야 했지만, 내가 못하니깐 간 것이라 인정했다”면서도 “하지만 8번은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나중에는 근성도 생겼지만 독한 마음도 먹게 됐다”고 말했다.

하라 감독은 2010년 시즌 이승엽이 조금만 부진해도 교체하거나 대타로만 내세웠고, 심지어는 기약 없는 2군행까지 내려 보내 그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결국 올시즌 4년 계약이 만료되자 요미우리 구단은 이승엽을 퇴출시켰고, 우승을 하지 못한 결정적 이유를 이승엽의 탓으로 돌리며 비난의 화살을 쐈다.

이같이 요미우리에게 헌신짝처럼 버림받았지만 오릭스에 새둥지를 트게 된 이승엽은 “기회를 준 오릭스에게 감사드린다. 요미우리가 보란 듯이 좋은 활약을 펼쳐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설욕을 불태웠다.

이 같은 다짐을 단 하루, 한 시간도 잊지 않고 생각했다는 이승엽은 “솔직히 센트럴리그에 남아 요미우리와 많이 맞붙고 싶었는데 조금은 아쉽다”면서 “그나마 교류전을 통해 맞붙는 요미우리와의 4경기에서 제대로 된 실력을 보여줘 나를 버린 건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을 반드시 보여줄 것”이라고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이어 이승엽은 “교류전 4게임을 위해서 준비하는 것은 아니지만 철저하게 준비해서 실력으로 요미우리에게 보여주겠다”며 애증 섞인 독한 선언을 했다.

◆ 새 시즌을 맞이하는 이승엽

퍼시픽리그로 돌아온 이승엽은 지바롯데의 김태균(28)과 같은 리그라 자주 맞붙게 될 것에 대해 “상대편이라 이겨야겠지만 서로 응원해주고 잘치고 잘 달렸으면 좋겠다”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마지막으로 이승엽은 “3년간 기대 이하의 성적을 냈기 때문에 국민들께 실망감을 안겨 죄송하다. 2011년 시즌에도 실력이 안 나온다면 야구를 그만둬야 할지 고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다.

덧붙여 “아직까지 이승엽이 죽지 않았다는 강한 모습을 증명하도록 좋은 타격과 플레이를 보여주겠다”고 자신했다.

과연 이승엽이 교류전에서 오릭스 소속으로 요미우리에 제대로 칼을 들 수 있을지, 또한 재기에 성공해 ‘국민타자’의 명성과 자존심을 회복할지 관심이 모아진다.

▲ 이승엽 ⓒ천지일보(뉴스천지)

▲ 스포츠스타를 모델로 작품에 담는 함영훈 화가(오른쪽)와 함께 이승엽을 만났다.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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