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정부 고위 당국자 입에서 최근 ‘미증유’라는 말이 입버릇처럼 쓰여 지고 있다. 코로나 19 확산으로 인한 국가적 위기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미증유의 국난이라면 임진전쟁이나 병자, 정묘 양란, 그리고 6.25 전쟁을 지칭해 왔다. 가장 비극적인 이 3대 전쟁으로 금수강산 한반도는 잿더미가 되고 죄 없는 민초들은 수십만, 수백만이 희생을 당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이를 극복해 역사를 지켜냈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은 6.25 동족상잔이란 엄청난 비극도 극복해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이 됐다.

미증유란 본래 불가의 능엄경에 나오는 글이다. ‘일찍이 있지 않았던 일(法筵淸衆, 得未曾有)’이라는 뜻으로, 처음 벌어진 일이라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을 지칭할 때 쓴 단어다. 임진전쟁 때 처음 ‘미증유’라는 용어를 쓰며 국가적 참상을 기록한 이는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이다. 김성일은 통신사 부사로 일본에 건너가 동태를 살핀 후에 돌아와 선조에게 왜군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장본인이다. 당략적 차원에서 보고한 것이 훗날 역사의 호된 비판을 받았다.

학봉은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자 죄책감이었던지 남들은 모두 산속으로 숨었으나 문관의 몸으로 의병을 일으킨다. 그가 선비들을 부추겨 모병을 한 글(招諭一道士民文)이 있다.

‘미증유의 국란을 당하여 간성들이 풍문으로 달아나고 무너졌으니 우리 백성은 누구를 믿어 도산하지 않겠는가. 이 때가 지사는 창을 베개 삼을 때이며 충신은 국가를 위해 죽을 날임에도 끝내는 아무런 호신의 보장이 없는 산곡에 숨었으나, 설사 적을 피해 몸이 보전된다 해도 열사는 오히려 부끄러이 여길진대… 나라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이 때에 머리를 싸매고 쥐 숨듯 하지 말고, 떨쳐 나와 만사를 무릅쓰고 함께 살아남을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진정 사람 된 도리라 않겠는가?…(하략)’

학봉의 호소는 흩어진 선비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선비들과 농부들은 의진(義陣)에 합류하여 낫과 칼을 갈았다. 학봉은 명장 김시민을 만나 진주성에서 일본군과 싸워 대승을 거둔다. 진주성싸움은 경상도 왜군에게 타격을 주어 전세를 뒤집는 계기가 됐다. 전후 왜군은 조선 의병들 때문에 임진전쟁에서 사실상 패전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전쟁 발발 후 계속된 기근과 전염병 창궐로 백성들의 삶은 지옥이었다. 당시 학봉을 도와 의병장으로 참여했던 정경운(鄭慶雲)의 ‘고대 일록(孤臺日錄)’을 보면 필설로 옮기가 민망할 정도이다. 가장 비극적인 참상을 ‘아수라(阿修羅)’라고 표현하는데 그 말이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그러나 참혹한 지경에서도 조선은 절망하지 않았다.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임금은 수라를 줄이고 부자들은 곡식을 내어 구제했다. 전쟁고아와 굶주린 백성을 돌보는 것이 국정의 제일 우선 순위였다.

코로나 19에 감염돼 확진 판정을 받고 사망한 유가족들의 사연을 보면 숙연해 진다.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남편과 아내를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도 있다. 코로나 음성판정을 받은 17세 소년은 마스크를 사기 위해, 1시간 동안 비를 맞으며 줄을 선 이후부터 폐렴 증세가 급격히 악화돼 8일 만에 숨져 부모가 망연자실하고 있다. 신문에 기록된 이 사실들은 훗날 미증유의 국난을 당한 아픈 역사가 될 것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서민 가정들은 아이를 맡길 어린이집도 문을 열지 못해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이 사태가 언제 종식된다는 전망마저 불투명하다.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한 선조들의 가르침대로 이제는 코로나 사태에 국민적 협력이 응집돼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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