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프라하의 얀 후스 동상
[역사이야기] 프라하의 얀 후스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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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작년 12월 중순, 체코 프라하 구시가 광장에서 얀 후스(1372∼1415) 동상을 봤다. 후스는 로마 카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다가 1415년 7월 6일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동상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5년(후스 화형 500주년)에 세워졌고, 1918년 베르사유조약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는 독립했다.

후스는 마치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걸어 나온 것처럼 두 조각상 사이에 우뚝 서 있다. 오른편에는 종교전쟁에서 승리한 후스파 전사들 조각이고, 왼편에는 1630년대 반종교개혁 시대에 체코에서 추방된 사람들이 웅크리고 있다.

후스 동상 앞면엔 글이 적혀 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진리를 요구하십시오.”

뒷면에도 글이 있다.

“나의 민족이여 부디 살아남으십시오. 당신의 나라가 당신에게로 돌아올 것입니다.”

얀 후스는 보헤미아 후시네츠에서 빈농(貧農)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프라하 카렐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1400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1402년에 베들레헴 채플에서 설교를 맡았다. 이어서 1402~1403년과 1409~1410년에 카렐 대학 총장을 지냈다.

영국의 신학자 존 위클리프(1320~1384)의 글에 매료된 후스는 모국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위클리프의 신념을 지지했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교리는 진리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위클리프의 사상은 보헤미아에 일찍 전파됐다. 1382년에 보헤미아 왕 벤첼의 누이동생인 앤 공주와 영국의 리처드 2세가 정략결혼을 했다. 보헤미아 학생들은 영국 옥스퍼드로 유학해 위클리프의 사상을 접할 수 있었고, 귀국 후 위클리프의 사상을 프라하 대학에 알렸다. 한편 후스는 베들레헴 채플에서 라틴어가 아닌 체코어로 설교했다. 벽에는 메시지를 풍자적인 그림으로 그려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했다. 또한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함께 식음한 사실에 근거해 이종성찬을 주장했다. 그동안 사제들만이 포도주를 마신 전례를 깬 것이다.

1410년에 후스는 종교개혁 투쟁에 뛰어들었다. 로마 카톨릭의 부패와 타락에 항거했다. 1412년에는 교황 요한 23(재위 1410∼1415)세의 면죄부 판매를 반대하는 공개논쟁을 벌였다. 로마·아비뇽·피사 등 3곳에 교황이 있는 교회 분열 시기의 피사 교황인 요한 23세는 원래 군인이었는데, 그는 사도라기보다 타락한 정치가였다.

1412년 9월에 요한 23세는 후스에게 성무금지령(聖務禁止令)을 내렸다. 10월에 후스는 프라하를 떠나 보헤미아 남부에서 2년간 ‘교회론’ 등 저술에 열중했다.

1415년에 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형선고 직전 후스는 교황 비판을 철회하면 살려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후스는 진리를 거스를 바엔 차라리 한 줌의 재가 되겠다며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7월 6일 화형 직전에 이렇게 말했다.

“오늘 당신들은 볼품없는 한 마리의 거위(후스는 체코어로 ‘거위’라는 뜻임)를 불에 태우지만 100년이 흐른 뒤에 영원히 태울 수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

후스의 유언이 맞았을까?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면죄부 판매를 반대하는 ‘95개조의 논제’를 제시해 종교개혁에 불을 지핀 것이다.

여담이지만 요한 23세는 성직(聖職) 매매와 여성 스캔들 때문에 체포돼 1415년 5월 29일에 불명예 퇴위당했고 1419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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