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선각자 도산 안창호 고귀한 생애 재조명(4)
[박관우 칼럼] 선각자 도산 안창호 고귀한 생애 재조명(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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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는 한마디로 한인들의 입장을 대변하여 주는 역할을 하였는데 당시 미국에 입국하는 한인은 여권이 없거나 법정 휴대금이 없는 경우에도 국민회에서 이민국에 보증하면 문제가 해결되었다.

아울러 국민회는 동포에게 매년 5달러의 국민 의무금을 징수하고 각 지방 대의원과 총회장의 선거를 투표로 하여서 민주정치의 훈련을 하였다.

또한 동포 상호간의 쟁의가 있을 경우에 법정에까지 끌고 가지 아니하고 국민회가 직접 해결하여 주었으니 한인사회에서 국민회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도산(島山)이 북미주 동포를 조직하였을 때 국내에서 러일전쟁이 결국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대한제국(大韓帝國)에 불리한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도산은 북미동포의 재촉으로 귀국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와 관련해 귀국하는 길에 도쿄(東京)에서 유학생 중 유명한 인물들을 만났는데 당시에 도쿄(東京)에는 태극학회(太極學會)라는 유학생 단체가 있었다.

태극학회는 외형상으론 유학생 단체라고 할 수 있으나 실질적으론 애국적 정당이어서 그 회합에서 국가의 운명과 시국에 대한 대책을 토론하였으며, 자체적으로 태극학보(太極學報)를 발행하여 국내 동포들에게 정치적 계몽운동을 하고 있었다.

태극학보는 애국적‧정치적 성격의 잡지로서 얼마 후에 대한유학생회(大韓留學生會)가 조직되었는데, 도산은 이러한 태극학회의 간부를 방문하였으며 본 단체에서 개최한 강연회에서 연설하면서 청중들로부터 명성을 얻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도쿄(東京)에서 연설을 통하여 명성을 얻었던 도산이 1907(융희 1)년 2월 20일 미국으로 출국한 이후 8년 만에 고국(故國)으로 귀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도산이 귀국하여 보니 주권은 이미 통감부(統監府)에 넘어갔으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독립협회(獨立協會) 활동 때부터 알고 있던 동지들이 건재하여 자신이 없는 동안에도 계속 항일운동(抗日運動)을 하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도산은 숙소를 남대문(南大門) 밖 제중원(濟衆院) 숙직실(宿直室)에 정하였으며, 여기서 제중원 직원이었던 김필순(金弼淳)과 함께 거처하면서 매일 한 번씩 문안에 들어오면 최남선(崔南善)이 경영하는 신문관(新文館)을 비롯하여 전덕기(全德基) 목사(牧師)가 시무(視務)하는 상동교회(尙洞敎會)와 원서동(苑西洞)에 있는 추정(秋汀) 이갑(李甲)의 집을 방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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