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독서

배영옥(1966 ~ 2018)
 

비석은
한 줄로 읽는 망자의 자서전

이름과 문중
그리고 매장 연도만으로도
일대기를 알 수 있다

자간은 좁고
행간은 넓다

짧은 주석 하나 없이
한 생애가
저리 일목요연할 수 있다니

저 두껍고 무거운 책 앞에선
누구도
비평을 달지 못하리라

[시평]

비석에는 죽은 사람의 한 생애가 참으로 간결하면서도 또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언제 태어났으며, 언제 죽었다는 가장 간단한 비문에서부터, 그 사람의 간략한 행적이 적혀 있는 비문까지, 비석은 망자의 전 생애를 담고 있는 행장(行狀)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문에 쓰인 글의 자간(字間)은 다닥다닥 붙어 있음이 일반이다. 그래서 그 자간은 좁다. 그러나 그 자간 너머에 있는 행간(行間)은 넓다. 쓴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모두 짧게 쓰고 또 읽어도, 이에 담긴 내용은 넓은 행간 속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것이 바로 비문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길다면 긴 한 사람의 한 생애가 담겨진 문장이니, 넓고 길지 않을 수 있으랴.
비문 앞에 서서, 비문을 읽는다는 것은 한 사람의 전 생애를 떠올리며 읽는 것이리라. 그러니 어디 비문을 읽는다는 것, 거룩한 독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한 사람의 생애가 담긴 두껍고 무거운 책 앞에선, 그 누구도 비평을 달지 못하리라. 어떤 생애라도 거룩하지 않은 생애는 없는 것이니까.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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