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은대리성 동벽
은대리성 동벽

은대리성 내외성을 갖춘 읍성

은대리성도 사적 제469호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이 성은 내성과 외성을 갖춘 판축 축조방식의 읍성형태이다. 외성의 전체규모는 1069m이고 내성의 둘레는 230m이다. 삼국시대 초기 왕성이라고 해도 될 만큼 규모가 작지 않다.

이런 형태의 축성기법은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과 평양의 대성산성에서도 확인된다. 충북 진천(鎭川) 대모산성도 비슷한 형태를 보여준다. 대모산성은 평지 이중성으로 초기 백제성으로 추정된다. 이 성도 고구려가 진천(고구려식 지명 만노군萬弩郡)을 점령한 시기 일시적으로 고구려인들이 거주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 성은 고구려 고뫼성, 공목달 시기 치소일까.

이 성도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의 형태다. 임진강과 한탄강이 지류와 만나 형성하는 삼각형의 대지 위에 조성된 성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청동기 시대 유물인 고인돌 2기가 남아있다. 그리고 은대리성 주변에서도 구석기의 흔적이 찾아진다. 이를 감안하면 이미 삼국시대 이전부터 인류가 살았음을 알려준다.

은대리 고인돌의 제원은 다음과 같다.

약 40m의 절벽으로 형성된 용암대지위의 소나무밭 사이에 3m정도의 간격을 두고 고인돌 2기가 나란히 놓여 있다. 1호는 동쪽 고인돌인데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이며 평면은 직사각에 가까운 긴 타원형이다. 동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상태가 양호하나 모서리 일부분이 절단된 상태이다.

서쪽 고인돌인 2호는 평면의 형태가 타원형인 뚜껑돌이 동서로 양분되어 부서져 있다. 뚜껑돌의 방향으로 보아 원래의 위치에서 이동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부는 겉으로 보기에 확인되지 않으나 땅 밑 20㎝정도에서 석재(石材)를 확인할 수 있다(두산 백과사전 참고).

은대리성에 관한 문헌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1995년 연천문화원에서 발간한 향토사료 집에 최초로 보고되어 있다. 이후 육군박물관에 의한 지표조사 ‘경기도 연천군 군사유적- 지표조사보고서(京畿道 漣川郡 軍事遺蹟- 地表調査報告書)’에 상세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2003년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에 의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성벽의 구조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조사보고서에는 은대리성의 평면은 삼각형이라고 밝히고 있다. 정방형의 성이 아닌 것도 흥미롭다. 아마 자연 지세를 가능한 이용했음을 알려준다. 남벽과 북벽의 일부는 강변의 자연 단애를 이용하였으며 동쪽 평탄지에만 지상성 벽을 구축했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를 보면 성벽의 높이는 호로고루성이나 당포성에 비하여 낮고 견고함도 떨어진다. 이는 전략적 성이라기보다는 읍성의 형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발굴조사에서 노출된 성벽의 단면을 보면 성벽의 기저부와 중간 부분은 점토와 모래로 판축을 하였고, 성의 외벽과 내벽만 석축을 한 구조이다. 이는 백제식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형태의 성들은 임진강 주변의 백제 초기 유적에서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은대리성의 축성기법이 호로고루성이나 당포성과 기본적으로 유사하다. 백제 토성을 이용하여 읍성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동벽의 외벽에 보축성벽을 쌓지 않았다는 점, 성벽의 높이가 높지 않지만 남벽과 북벽에도 동일한 구조의 지상성벽을 쌓았다는 점이 그렇다.

7세기 중반 호로고루나 당포성은 신라에 의한 정복되었다. 동벽 바깥에는 석축성벽을 덧붙여 신라에서 쌓은 흔적이 확인되며 내외성을 구분한 토루에서 석축의 유구를 확인할 수 있다. 신라가 점유한 이후 보축한 것을 알려준다.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성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성

고구려성 특유의 치성 확인

조사보고서를 보면 문지 3개소를 비롯하여 대형건물터 1개소, 치성(雉城) 3개소가 확인되었다. 문터는 북벽과 남벽의 비교적 지형이 낮은 곳에서 확인되었는데 북벽에 있는 2개의 성문은 배수기능도 겸하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대규모 건물지는 이곳을 다스리는 관아 건물이 아니었을까. 건물터는 남벽에 인접한 외성 중앙부에 위치해 있는데 건물의 외곽담장 축조 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석재가 사방에 3m폭으로 무너져 있다. 담장의 내부공간은 동 서 60m, 남북 30m 정도나 된다.

고구려 특유의 ‘치성’은 성의 북동 회절부와 북문터 서쪽 및 남문터 서쪽에서 확인되었다. 북문터와 남문터 서쪽의 치성은 8×5m의 동일한 규모로 체성에서 ‘ㄷ자’ 형태로 돌출시켜 성문의 방어력을 높였다. 흡사 포천 반월성 충주 장미산성의 치성을 연상시켜준다. 이처럼 성문 주변에 방형 치성을 설치하는 구조는 고구려성의 특징이기도 하다.

연천군 세계문화유산 등재 절실

연천군은 선사문화유적의 보고이다. 글마루 답사반이 이번 당포성에서 수습한 구석기 유물은 매우 중요하다. 전곡리 유적을 더욱 뒷받침 할 수 있는 유물이며 연천군 한탄강, 임진강 유역이 세계적인 구석기 유적의 보고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유적들은 많이 파손되지 않았으며 향후 발굴을 통해 더 많은 자료들이 찾아 질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고 호로고루 당포, 은대리에서 확인한 고구려 유적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했다. 이곳에 서는 1500년 전 고구려 왕도였던 중국 지안이나 북한 평양성에서 발견되는 적색의 기와가 찾아졌다. 다양한 무늬의 평기와도 다수 확인되었다. 이 기와들은 남한지역에서 찾아지는 고구려계 와편의 비교연구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천제의 아들 주몽이 건국하여 대륙의 주인공이 되었던 고구려. 그 문화는 매우 강열하고 다 양함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를 통해 임진강은 주목받았던 터전이요, 역사의 무대였던 것이다. 고구려 유적이 산재하므로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더욱 생생히 부각시키고 있다.

이 지역은 북한 땅과 인접하여 개발이 안됐다. 그것이 이 지역의 유적을 고스란히 보존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의 등재가 더욱 절실해지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당포성에서 찾아진 구석기
당포성에서 찾아진 구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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