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당포성 주상절리
당포성 주상절리

주상절리 위에 세운 당포성

주상절리(columnar joint, 柱狀節理)는 한탄강에 있는 아름답고 절묘한 절벽 층위이다.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곳은 주상절리의 신비로움 때문이다. 주상절리는 어떤 것인가. 절리에는 쪼개지는 방향에 따라서 판상(板狀)절리와 주상절리가 있는데 주상절리는 단면의 모양이 육각형, 오각형 등 다각형의 장주상(長柱狀: 긴 기둥 모양)을 이루는 절리를 말한다.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된다.

화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지표면에 흘러내리면서 식게 되는 데 이때 식는 과정에서 규칙적인 균열이 생겨 형성된 것이다. 자료를 인용하면 용암은 표면부터 식을 때 균열이 육각형 모양으로 형성되고 점점 깊은 곳도 식어가면서 균열은 큰 기둥을 만들어낸다.

주상절리 위에 세워진 당포성은 현재 사적 제468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 편찬된 지리지에는 당포성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미수 허목(眉叟許穆)의 <기언별집(記言別集)> 제15권 ‘무술주행기’에 “마전 앞의 언덕 강벽 위에 옛 진루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위에 총사가 있고, 그 앞의 나루를 당개라 하며 큰물이 흘러 나룻 길로 통한다”고 기록, 당포성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다.

당포성은 현재 전곡읍의 서북쪽 임진강 북안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강과 그 지류에 의해 형성된 천연적인 절벽을 이용하여 축조된 강안 평지성이다. 호로고루성과 비슷한 형태를 보인다. 그렇다면 호로고루와 당포성을 점령한 고구려 군사들이 참가하여 비슷한 요새를 구축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단애지대를 남북으로 가로막아 축조하였기 때문에 서쪽 부분이 뾰족한 모양인 삼각형 형태 이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동쪽 성벽은 매우 높게 되어 있으며 단애지대를 따라 조성된 남북의 성벽은 낮게 축조되었다.

당포성도 호로고루처럼 큰 성은 아니다. 서쪽 끝에서 동벽까지의 길이는 200m, 동벽의 길이는 50m, 전체 둘레는 450m이다. 이 성의 특징은 보축벽이 3~4중이며 높게 쌓았다는 것이고, 성벽 밖에 폭 6m, 깊이 3m의 대형 해자가 있다. 특히 성벽 상단부위에 이른바 ‘구멍기둥(柱洞 또는 石洞)’들이 확인됐다.

발굴 당시 성벽에 일정한 간격으로 수직 홈이 파여져 있고 그 끝에 동그랗게 판 확(確)돌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학자들은 고구려성인 평양의 대성산성의 중간 벽과 호로 고루의 체성 벽 안쪽 내벽에서도 확인된 것으로 고구려의 축성술을 보여주고 있다.

성 기초부의 중심부는 흙으로 다짐을 한 백제식 판축으로 구축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이 성의 본래 주인이 백제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판축(版築) 위에 체성 벽이 올라가고 체성 벽 바깥쪽에 보축성벽을 쌓아 체성 벽의 중간부분까지 이르도록 했다. 그리고 보축성벽의 바깥 쪽에는 중간부분까지 다시 점토로 보강했다.

당포성의 축성기법은 토성과 석성의 축성기법을 결합한 구조다. 고구려 국내성과 평양의 대성산성의 축성기법과 동일한 기술적 일면이지만 남한지역에서도 많이 확인되었다. 글마루 취재반이 조사한 파주 반월성지, 양구 비봉산 성지, 충주 장미산성지, 단양 적성지 등에서 이 같은 방식의 축성술이 확인되고 있다.

당포성
당포성

취재반이 수습한 고구려 잔영

9월이 되니 제법 가을 기운이 완연하다. 취재반은 당포성부터 답사했다. 필자는 몇 년 전에 이곳을 지인들과 답사한 적이 있다. 당시는 정비가 안 돼 이곳저곳에서 많은 와편을 볼 수 있었다. 농로를 걷다 구석기 유물인 뗀 석기를 수습하기도 했다. 그러니 이번이 두 번째 답사 길이다.

한눈에 들어오는 당포성 풍경은 호로고루와 너무도 흡사하다. 잘 정비된 석축의 성벽, 말끔 히 정돈된 성안의 잔디밭은 오히려 고색창연 했던 옛 모습을 잃고 있다.

취재반은 여러 곳에서 삼국 역사의 편린을 찾았다. 연질의 회백색 백제 와편과 토기편 적색의 고구려 와편을 수습했다. 신라계도 찾았다. 그러나 역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고구려 와편이다. 이는 호로고루성의 예와 같다.

적색의 와편은 격자문, 사격자문 또는 승석문 들이다. 호로고루 혹은 포천 반월성, 양구 비봉 산 출토와편들과 흡사하다. 속리산이 가까운 괴산 청천리 도원리 사지에서 수습한 기와를 닮은 것도 있다.

고구려를 상징하는 색은 적색이었다. 궁궐을 빨갛게 칠하고 기와도 빨간색만을 사용했다. 이들의 신앙은 태양이었다. 바로 천제의 후손이었으므로 태양에 산다는 삼족오(三足烏)를 엠블럼(상징, 문장紋章)으로 삼기도 했다.

적색의 깃발을 들고 다닌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확실한 표지를 세웠다. 바로 붉은 색의 건물이다. 그것이 지붕을 덮는 와당으로도 증명된다. 호로고루 당포성에는 와당을 사용한 장엄미의 붉은색 건물이 있었을 것이다.

취재반은 건물지 옆의 돌무더기 위에서 구석기 긁개 한 점을 찾고 인근 경작지에서 여러 점의 구석기 유물을 수습했다. 그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주먹도끼 한 점이었다. 이로써 호로고루 이어 당포성도 광범위한 구석기 유적임을 확인한 것이다.

취재반이 수습한 구석기 시대의 주먹도끼
취재반이 수습한 구석기 시대의 주먹도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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