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와 함영훈 화가가 함께 떠나는 스포츠 in 열정- 이승엽]
“팔꿈치 수술 부위 나을 때까지만 타자하기로 했는데…”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아시아 신기록인 한 시즌 최다홈런(56)의 소유자. 국가대표로 출전한 국제대회에서 중요한 고비마다 결승포를 때려 온 국민들을 울고 웃게 만든 사나이가 있다. 바로 ‘영원한 국민타자’ 이승엽(35, 오릭스)이다.

지난해 최악의 해를 보낸 후 요미우리에서 굴욕적인 퇴출을 당한 이승엽은 올시즌 일본프로야구 오릭스에서 새둥지를 틀고 명예회복을 노리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함영훈 화가와 함께 이승엽을 만나 그의 야구인생을 들어봤다. 스포츠 스타를 모델로 캔버스에 담아 작품을 만드는 함영훈 화가의 두 번째 작품전인 ‘스포츠로 이야기하다-열정전 미술전시회’ 준비의 일환으로 이승엽과 만남을 갖게 된 것.

열정전은 함영훈 화가가 장애 체육인을 응원하기 위해 대한장애인체육회와 서울시장애인체육회 협력으로 기획된 전시회며, 수익금은 장애 체육인을 위해 돕게 된다.

야구는 어쩌면 운명

▲ 이승엽 ⓒ천지일보(뉴스천지)

운동을 시작하기 전까지 어릴 적 이승엽은 동네를 휘젓고 다녔을 정도로 개구쟁이이면서 골목대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놀 시간이 없어져서 오히려 성격이 내성적이고 조용해졌단다.

이승엽이 야구를 시작하게 된 것은 봉덕초등학교 시절 멀리던지기 시합에 나갔다가 대구 중앙초등학교 야구 감독의 눈에 들면서부터다. 1위도 아닌 3위를 했지만, 체격이 좋고 왼손잡이라는 점에서 어린 이승엽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이승엽도 원래 야구선수가 꿈이었기 때문에 감독의 권유에 바로 중앙초교로 전학을 가서 야구를 시작하게 된다.

“어릴 때 보통 대통령이나 과학자, 의사 등을 꿈꾸는데 나는 의외로 혼자 야구 선수였다”면서도 “만약에 이때 야구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야구를 매일 즐기는 일반 직장인 정도로 남았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니 이때가 운명의 시작인 듯하다.

“아마 야구가 아니었으면 결혼도 못했을 것”이라며 미모의 아내 이송정 씨를 만나 현재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된 것에 대해 야구에게 모든 공을 돌렸다.

아울러 “야구의 꿈을 이뤘고, 후회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하니 애초부터 운명은 그를 국민타자로 점찍고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투수 이승엽 고교 시절 맹활약

▲ 경북고 시절 투수로 활약  모습

대부분이 알고 있듯 국민타자 이승엽은 투수 출신이다. 중학교 3학년 시절 이승엽은 당시 나이대에 비해 대단한 스피드인 135km를 던지기도 해 장래가 촉망되는 강속구 투수로 주목받았다.

“투수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있어 좋다. 타자는 한 번 타석에서 못 치면 다음 타석이 돌아올 때까지 오래 기다려야 하지만 투수는 실패하면 또 던지기 때문에 좋았다”는 게 투수를 하게 된 계기라 한다.

특히 모든 관중이 투수가 있는 마운드에 집중을 하기 때문에 주인공이 된 듯한 짜릿함이 좋았다며 그는 잠시 투수 이승엽으로 돌아갔다.

경북고로 진학하면서 이승엽은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2학년 때 출전한 청룡기 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선 홈런, 승리투수, 최우수투수상을 싹쓸이하는 등 투타에서 맹활약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투수 이승엽이 버티고 있는 탄탄한 마운드 덕에 경북고는 고교 야구대회의 꽃이라 불리는 청룡기대회에서 12년 만에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냈으며, 이승엽은 구대성의 계보를 잇는 청룡기 왼손투수 스타가 됐다.

3학년 시절 캐나다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는 투수보단 타자로 맹활약해 우승에 기여하기도 했다.

◆ 삼성 입단, 팔꿈치 부상에 타자 전향

이승엽은 고교 졸업 후 한양대 진학을 포기하고 삼성에 바로 입단을 하게 된다. 그는 “처음에는 이만수 등 20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 여럿 선배들과 함께 있으니 기가 죽어서 대학에 가지 않은 것을 후회를 많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적응이 되니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깨닫고 프로의 길을 선택한 것에 만족해하며 프로선수로 성장해 갔다.

그러나 입단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간, 이승엽은 팔꿈치 부상으로 수술을 받게 돼 투수생명에 위기를 맞게 된다. 학창시절 마운드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며 너무 많이 던진 것이 화근이 된 것.

이승엽이 투수로서 재기하기 위해 몰두하던 중 당시 박승호(현 두산 2군 감독) 코치가 그에게 타자로 전향할 것을 권유하면서 본격적인 타자의 길이 시작된다.

투수의 매력에 빠져있던 이승엽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기는 만무한 일. 그는 완강히 거부했고, 박 코치는 한 달 정도를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겨우 그를 타자의 길을 걷게 했다.

이승엽 역시 백프로 승낙한 것은 아니었고, 수술 받은 팔꿈치가 회복될 때까지라는 전제를 달고 허락했을 정도로 투수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다. “고교 때 타자로 활약한 경험이 있긴 했지만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크기 때문에 타자로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고집을 부린 이유였다는 것.

수술 부위가 나을 때까지 잠깐 타자로 전향하겠다고 생각한 이승엽이었지만 그는 처음 야구를 시작하는 것처럼 비디오 분석부터 끊임없는 배트연습까지 하는 등 소홀히 하지 않았다.

결국 노력의 대가는 그대로 나타났고, 이승엽은 타자로 전향한 그 해에 선동렬 전 감독과 함께 최고의 원투펀치로 이름을 날리던 이강철 코치로부터 첫 홈런을 뽑아낸 것을 시작으로 홈런 13개를 치면서 타자로서 뛰어난 재능을 어김없이 프로에서도 발휘했다.

성적이 좋게 나오다 보니 이승엽도 자신감이 생겼고, 투수로 돌아가겠다는 다짐도 잊은 채 계속 타자로 나서 프로 3년차인 1997년에는 32홈런을 터트려 생애 첫 홈런왕에 오르며 성공신화를 써가기 시작했다.

1998년 시즌에는 홈런왕 2연패를 눈앞에 두고 우즈에게 내준 뒤 오기를 품은 그는 1999년 시즌 한국프로야구사에 유례없는 신기록인 54홈런을 터트려 국민타자로 발돋움하게 된다.

삼성에 입단하자마자 찾아온 팔꿈치 부상이 오히려 이승엽에게 터닝 포인트를 가져다 준 셈이다.

▲ 이승엽 ⓒ천지일보(뉴스천지)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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