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호로고루성 홍보관
호로고루성 홍보관

삼국이 쟁패한 성 발굴면모

호로고루는 해발 약 28m의 현무암 수직단애를 이루는 구릉상에 축조되어 있는 평지성이다. 고구려는 대개 높은 산악을 의지하여 테메식 혹은 포곡식성을 축조하여 경영했는데 호로고루는 백제로부터 빼앗은 후 이곳의 지리적 이점 때문에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

성은 삼각형 모양의 평면을 하고 있는데, 전체 둘레는 401m 정도이며, 전체면적은 2000평 정도이다. 성벽은 ‘한들벌’로 이어지는 동쪽 부분만 남북을 가로질러 협축식(夾築式) 성벽을 축조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내탁하여 편축식(片築式)으로 축조하였는데, 높이는 대체로 4~5m를 나타내고 있다. 연천 호로고루 정밀지표조사 보고서(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1999년)에는 이 성의 발굴결과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호로고루의 축조상태를 동벽에서 살펴보면 판축부(版築部)와 석축부(石築部), 보축부(補築 部)로 나눌 수 있다. 먼저 판축부는 성의 기단부 전체를 받치고 있다. 그리고 성벽의 중간부 분은 판축토를 중심으로 양쪽이 대칭을 이루는 석축부가 있다. 성 내부의 석축부는 외곽의 석축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양의 석재가 사용되고 있는 반면, 외부의 석축부는 두텁고 높게 쌓여 있다.

이와 같은 성벽 축조방법은 평양 대성산성에서 확인되고 있다. 또한 외부의 석축부 바깥에는 보축부가 있고, 보축부의 바깥쪽 기단부에는 다시 점토를 다져 놓은 상태이다. 동벽의 높이는 10m이고 하단부의 너비는 약 40m에 달하며, 전체 길이가 90m정도이다. 성 벽의 단면을 살펴보면 기저부 단면의 너비는 32m에 달하며, 단면부의 높이는 6m 정도이다.

성벽은 중간부분의 사질 판축부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형이나 중간부분이 서쪽으로 치우쳐진 상태이다. 성벽 중간의 사질 판축부분은 상단의 너비가 3.6m, 하단은 4.6m를 나타내며, 판축부에서 석축(石築) 부분은 동쪽부가 6.4m, 서쪽부가 7.4m로 확인되고 있다. 성벽의 경사도는 내벽이 15˚, 외벽이 35˚의 경사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동벽 정상부의 경우 동사면이 40˚, 서사면이 30˚를 유지하고 있다. 동벽 내벽은 판축토 위에 20~30㎝, 30~40㎝ 크기의 현무암 할석(割石)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석축의 너비는 8.5m정도이다. 가운데 판축부는 바닥에서 1.2m까지는 0.1~0.5m 내외의 판축층이 이루어져 있으며, 그 상부에 회갈색 사질 점토층이 3m 높이로 구축되어 있다. 이 층에는 상당량의 고구려 토기편이 혼입되어 있는 상태이다. 외벽 석축부는 1.2m 높이의 판축토 위에 구축된 0.6~0.8m 두께의 갈색 점토층 상부에 현무암의 성석(城石)을 사용하여 거의 수직에 가깝게 12단 1.8m 높이로 축조하였다.

한편, 호로고루에서는 2점의 목탄시료가 발견되어 그 분석을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미국의 BETA연구소 및 서울대학교에 의뢰하였는데, 두 시료에 대한 분석결과 성내의 건물지 바닥 에서 수습된 목탄의 보정연대치는 국립문화재 연구소가 430~620년, BETA연구소가 430~660년으로 거의 유사한 결과가 나왔다.

호로고루성의 축조 시기는 동벽을 축조하지 않았던 시기와 동벽을 축조한 이후의 시기로 구분되며, 그 구분 시점은 광개토대왕에서 장수왕대의 어느 시점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나 다른 역사서에 기록된 시기와 비슷하다.

연천군 전곡리 유적지 입구
연천군 전곡리 유적지 입구

구석기 유물 발견 세계문화 유산 등재 돼야

글마루 취재반은 8월초 36도가 넘는 날씨에 이 성을 답사했다. 강바람이 불기는 했으나 연신 흐르는 땀으로 목욕을 했다. 입구에 마련된 ‘호로고루홍보관’ 앞에 우뚝 서 있는 광개토대왕비가 눈에 띈다. 시멘트로 만들었으나 고졸한 예서가 옛 맛을 느끼게 했다. 홍보관에 근무하는 한혜령 문화관광해설사는 이 비석이 지난 2002년 북한에서 기증한 것이라고 들려준다. 이곳에서 출토된 고구려계 수키와 등의 무늬 는 격자문, 사격자문, 승석문 등이다. 굵은 무늬의 ‘卍’자가 시문된 것도 있다. 또 2000년 발굴당시 청동제 오존불(五尊佛)이 발견돼 주목 되었다. 그렇다면 성안에 가람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인가. 붉은 색은 고구려계이고 회백색은 신라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무늬를 가진 기와가 출토되는 곳은 포천 반월성, 양구 비봉산성, 단양 적성 등이다.

그런데 이날 답사에서 매우 흥미로운 유물을 수습하기도 했다. 고구려 시기보다 훨씬 올라가는 구석기 유물이다. 강변과 가까운 경작지 수로에서는 개차돌로 떼어 만든 아슐리안 구석기주먹도끼가 찾아졌다. 이는 5만 년 전 이전의 유물로 추정된다. 이 유물들은 연천지역 대단위 구석기 유적인 전곡리와 당포 그리고 남계리 유적과 비교된다. 호로고루 지역에서의 발견은 연천 일대의 구석기 유적이 한반도에서 가장 크며 세계적임이 확인된 것이다. 서둘 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호로고루성을 처음 축조한 백제 이전부터 주민들이 살았던 것임을 알려준다. 수만년 전부터 이루어진 아름다운 터전이 삼국시대에는 전장으로 변하고 지금도 남과 북이 갈려 대 치하는 곳이 되었다. 이 성을 답사하면서 고구려, 신라가 그랬듯이 외적의 침입에는 함께 힙을 합쳐 대응하는 민족화합의 날은 언제일까 생각해본다.

호로고루성 유적지에서 발견한 구석기 주먹도끼 뒷면
호로고루성 유적지에서 발견한 구석기 주먹도끼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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