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도산(島山)이 세상에 본격적인 두각을 나타낸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평양 쾌재정(快哉亭)에서 필대은(畢大殷)과 함께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열고 수백명의 청중들이 모인 집회에서 당시 평양감사 조민희(趙民熙)도 참석한 상황에서 마치 사자후와 같은 열변을 토하여 그 명성이 관서 일대에 널리 알려졌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선포된 이듬해인 1898(광무 2)년 도산은 이씨 부인과 약혼 중에 있었으나 혼인은 공부하고 돌아온 이후 하기로 결심하고 10년 이내에는 돌아올 기약이 없다는 것을 이씨 집에 선언하고 도미(渡美)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와 관련해 도미하기 전에 일단 정세를 파악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 왔으며, 정동에 위치한 미국 선교사의 사숙(私塾)에서 공부하다가 22세가 되는 1899(광무 3)년 대망의 장도에 올라 인천서 미국선을 탑승하였는데 놀랍게도 이씨 부인이 도산을 따라와서 배가 출발하기 전에 극적으로 합류하게 되었으니 과연 그 남편에 그 부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도산이 도미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는 나라가 힘이 없어서 외세에 끌려 다니는 것을 보면서 뜻한 바가 있어서 공부하기 위하여 떠난 것인데 막상 현지에 도착하고 보니 생각지 않았던 변수가 발생하였다.

그것은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길가에서 한인 두 사람이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을 미국인들이 흥미롭게 지켜보는 현장을 도산이 목격하여 두 사람에게 싸우게 된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래서 그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는데 그들은 중국 교민들에게 인삼 행상을 하는 상인들이었는데 서로 간에 협정한 판매 지역을 침범하였다는 이유로 싸우게 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산은 이러한 사건이 발생한 이후 샌프란시스코에 체류하고 있는 동포들의 집을 방문하여 그 전반적인 생활실태를 조사하였으니 이런 것만 미루어 보아도 도산의 인품(人品)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사를 마친 이후 여러 차례 심사숙고한 끝에 본래 계획하였던 학업을 일단 중단하고 동포들의 복지증진(福祉增進)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동지로 동행하였던 이강(李剛)을 비롯하여 김성무(金聖武), 정재관(鄭在寬) 등에게 알렸다. 이제 동지들도 도산의 뜻에 찬성하고 생활비는 자신들이 해결할 것이니 도산은 앞으로 동포들의 생활을 지도하는 데 전력하여 줄 것을 부탁하였다.

도산은 이러한 동지들의 결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동포들의 생활 향상을 위하여 분골쇄신(粉骨碎身)하기로 결심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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