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비중리 절터 전경
비중리 절터 전경

낭비성은 어디인가

낭비성은 김유신 장군에게는 매우 중요한 결전의 성이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金庾信) 전에 의하면 629(진평왕 51)년 신라의 임영리(任永里)·용춘(龍春)·백룡(白龍)·대인(大因)·서현(舒玄) 등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 승리를 이끈 것으로 나온다. 이때 김유신은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참전하여 뛰어난 용맹으로 고구려 군사 5000여 명을 목 베고 1000여 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이 전쟁이 바로 김유신 장군이 승승장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격전의 현장인 낭비성은 지금의 어디가 될까. 학자들은 충청북도 지역 혹은 경기도 북부 지역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대동지지>에서는 충주(낭자곡성)로 비정하였으며 <신증동국여지 승람> 등의 지리서들은 오늘날의 청주 지방을 삼국사기의 낭비성(娘臂城), 비성(臂城)이라 하고 있다.

청주 지역의 역사학계를 이끌던 고(故) 이원근 교수는 청주시 북이면 부연리와 토성리에 걸 쳐 있는 속칭 ‘남비성’을 낭비성으로 추정했다. 남비성은 비중리 절터에서 북쪽으로 얼마 되 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부연리의 옛 산성은 높이 250m의 야산에 석축 되었으며 바로 부근에 노고성(老姑城)이 있어 주·부성(主副城)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7세기 전반기의 신라와 고구려의 경계는 오늘날의 임진강 유역이어서 문제가 있으나 지명이 그대로 전존되어 주목되고 있다.

화랑정신은 오늘날 청소년 정신문화의 지표로서 삼아도 손색이 없다. 나라사랑과 부모에 대한 예의와 신의 그리고 인생을 개척하는 백절불굴의 정신이다.

청주 초정행궁터
청주 초정행궁터

세종대왕이 치료하던 곳, 초정약수

초정약수는 <동국여지승람> 제15권에 청주 목산천 조에 그 유래가 나온다. ‘초수 재주동삼십구리 기미여초 랭욕칙이질 아세종세조상행 우차(椒水 在州東三十九里 其味如椒 冷浴則已疾 我世宗世祖嘗幸 于此)’ 라고 되어 있으며, 조선 태종 때 방문중(房文仲, 사헌부 집의)의 시와 세종 때 문사 이승소(李承召)의 시가 초수를 칭송했다. 초정약수의 발견은 지금부터 600년이 넘는 셈이다.

세종은 이곳 행궁에서 약 60일을 머물면서 안질을 치료했다. 그런데 세종이 안질만을 치료하기 위해 이렇게 장기간을 머무를 수 있었을까. 일설에는 속리산에 있던 신미대사(信眉大師)와의 회동을 점치는 견해도 있다. 신미대사는 당시 범어에 가장 능통했다. 한글 창제에 가장 긴요했던 범어를 익히기 위해 세종은 초정 에 머물면서 신하들의 반대를 피한 것일까.

신미대사 약전을 보면 그는 충북 영동에서 부친 김훈(金訓)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김수온 (金守溫) 선생의 형님으로 본명이 수성(守省), 본관은 영산(永山)이다. 어려서부터 두뇌가 총 명하여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았는데 글을 읽어 집현전 학사로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벼슬 에 마음이 없고 불가(佛家)에 뜻이 있어 자칭 신미(信眉)라 하여 머리 깎고 스님이 되었다.

세종 26년에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을 잃고 세종 27년에 일곱째 아들인 평원대군 (平原大君)을 잃었다. 더구나 세종 28년에 소헌왕후(昭憲王后)를 잃고 말았다. 3년 동안에 세 사람을 떠나보낸 세종의 슬픔과 허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세종은 신미대사로 하여 금 약을 쓰게 하니 완쾌하였다. 그로부터 세종은 신미대사와 특별히 가까워졌다. 이때 세종 은 <능엄경(楞嚴經)>에 깊은 매력을 느껴 항상 이 경을 읽고 실천하는 데 주력했다고 한다. 능엄경은 바로 세종에게는 애민(愛民)의 경전이었다. 능엄경을 읽으면 만사가 여의(如意)하고 뜻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진다고 믿은 것이다.

세종은 생전에 신미대사에게 혜각존자(慧覺 尊者)의 호를 내리려고 했다.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 融無碍 慧覺尊者)’라 지어 문종에게 위임하여 부왕을 대신하여 신미대사에게 사호(賜號) 하였다. 여기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바로 ‘우국이세’라는 대목이다. 국가를 가장 이롭게 했다는 칭호였다. 이 시호 가운데 혹 한글창제에 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특히 세조와는 수양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웠다. 세조는 왕위에 올랐어도 꼭 ‘존자(尊者)’라 불렀고 국사로 모셨다. 세조 7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신미대사를 우두머리로 효령대군(孝寧大君)과 김수온(金守溫) 등에게 일러 불서 100종을 간행토록 했다. 세조가 강원도 상원사에 행행하여 피부병을 치료했을 당시 신미대사는 수백리 길을 노구를 이끌고 가 배알했다. 뜻밖에 신미대사의 출현으로 상원사는 진한 감동의 물결이 이어졌다. 세조는 신미대사를 상객으로 모시고 법문을 들었다.

현재 초정약수 원탕 부근에는 세종, 세조가 묵었던 행궁 복원사업이 한창이다. 준공을 얼마 앞두고 있으며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행궁 터가 완공되면 초정약수 일대도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될 전망이다. 초정약수와 구녀성, 비중리 일광삼존불, 낭비성은 한 사이트 안에 있다. 이곳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중시한 고구려가 100년 동안 지배하고 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비밀이 구녀성과 일광삼존불 그리고 낭비성에 담겨 전해진다. 아직도 고구려는 역사속에 살아있다.

구녀산성에서 찾아진 와당
구녀산성에서 찾아진 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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