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불안한 세상에 사는 인간은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곳이 그립다. 생명의 양육이 인간의 존재 이유라면, 의식은 인간을 만물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존재로 살아가게 한다. 생명은 정(精)을 만든다. 인간이 아니라도 정을 지닌 존재가 ‘요정(妖精)’이다. 요정은 아름다워도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으로 살아가는 인간처럼 다이나믹하지는 않다. 정은 음성과 양성으로 양분된다. 두 가지 정이 화합하면 ‘신(神)’이 탄생한다. 전통의학자에게 신은 신앙적 대상의 신이 아니다. 귀신은 생명의 존재형식에서 벗어나 우주로 ‘돌아간(歸)’ 신이다. 생명은 신이 육체에 머물고 있는 상태이다. 신은 몸에 머물기도 하지만, 바깥으로 나갔다가 돌아오기도 한다. 이것을 혼(魂)이라고 하며, 우리말로는 ‘얼’이라고 한다. ‘얼빠진’이란 혼이 신을 따라 바깥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상태이다. 정은 인체 형성의 기본요인이기도 하지만, 생명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로 인체의 각 기관을 왕래하면서 생명활동을 영위한다. 정력이 좋다는 것은 정의 활동력이 왕성하다는 뜻이다. 정을 따라 인체 각 기관을 왕래하는 것은 백(魄)이다. 우리말로는 ‘넋’이라고 한다. 정과 백은 인체를 벗어나지 않는다. 신이 정과 결합된 것이 정신이고, 혼과 백이 인간의 몸에서 온전하게 활동하면 심신이 건강하다.

인간의 삶은 외물, 즉 환경과의 상호작용이다. 오관을 통해 외물을 감지하는 총체적인 작용을 ‘심(心)’이라고 한다. 심은 감성과 이성을 포함한 일체의 사고활동이다. 영어로 이성적 사유를 mind라 하고, 비사유적 기능인 자연적 감성을 heart라고 한다. 심은 이 두 가지가 결합된 두뇌활동이다. 심을 통한 외물의 감지를 종합, 유추, 분석해 판단하는 사고활동을 ‘의(意)’라고 한다. 공자는 의를 글이나 말로 모두 표현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그러므로 의를 알려면 말과 글의 한계를 인정하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는 의를 알기 위한 시도를 ‘학문(學問)’이라고 했다. 의는 현대 심리학의 ‘무의식’ ‘본능’ ‘Super ego’, 불교에서 말하는 ‘자성(自性)’과 유사하다. 선승은 이를 알기 위해 수행하고, 목사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기도한다. 의는 감지한 외물의 창고에 불과하다. 잘 발달된 창고는 정리정돈까지 훌륭하다. 의의 작용은 이러한 정리정돈이다. ‘ego’를 억제하거나 바람직한 방향으로 돌리는 것이 ‘Super ego’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창고에 가득 들어 있는 것을 바깥으로 끌어내야한다. 창고의 정보를 반출하는 작용이 ‘지(志)’이다. 남다른 뜻을 품은 사람을 ‘지사(志士)’라고 한다. 지사는 단순히 의기를 품었다고 성취할 수 있는 명예가 아니다. 의라는 창고에서 필요한 자원을 이용할 계획이 확실하므로 흔들리지 않고 행동한다. 지를 상황에 따라 적용하는 것을 ‘사(思)’라고 한다. 사상은 적용 방법에 대한 계획이다. 계획이므로 현실과 다를 수도 있고, 목표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 사상은 내부의 깊은 추론과 인식을 통해 형성된 추상적 의지와 달리 외부에서 흡수한 정보를 외향화할 때 개입되는 주관적 판단이다. 그러므로 사상은 외부에서 입력되는 정보에 따라 변화된다. 의지는 자신의 성찰에서 나온 것이므로 상황에 따라 쉽게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통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지의 피상적인 운용계획인 사를 가리킨다.

공자가 ‘학습을 하되 사가 따르지 않으면 헛된 것이고, 사를 하되 학습을 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라고 한 것은 외부 정보에 대한 주관적 해석과 보편적인 지식의 융합을 강조한 말이다. 운용계획을 세웠다고 끝나지는 않는다. 우리는 생각을 했다고 바로 실천하지 않는다. 자기 생각을 의심하기도 하고, 부딪치는 난관 때문에 당황하기도 한다. 내 생각 어딘가에 문제가 있지는 않을까? 이런 고민을 ‘려(慮)’라고 한다. 글자를 잘 보라! 虍와 思가 결합되어 있지 않은가? 호랑이 뱃속에 들어 있는 기분! 그것이 ‘려’이다. 변화를 구한 것이 ‘사’이고, 앞날을 생각하는 것이 ‘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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