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우 부산환경교육센터 이사

시민의 삶과 도시의 품격을 결정하는 척도는 높은 빌딩도 반듯한 자동차 도로도 아닌 보행에 있다. 관광지로 유명한 해외 주요도시들의 특징이 바로 도심 한복판을 걸어서 다닐 수 있다는 점은 이를 잘 말해준다. 뉴욕이나 보스턴, 런던이나 파리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적 유명도시들은 도심 안에서 보행과 휴식, 문화와 힐링이 가능하게 조성돼 있다.

서울시 역시 이를 인식하고 서울시의 역점사업인 도시재개발과 도시재생 사업을 ‘보행친화도시’에 초점을 맞추고 추진하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자신의 서울시 미래계획 중 가장 우선순위로 ‘걷기좋은 도시, 서울’을 꼽으며 이의 완성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박 시장은 보행친화도시를 넘어 보행특별시를 선언하며 임기 내 가시적 성과 달성을 위한 조치를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보행 도시’는 언뜻 서울시 주요 사업 중 하나로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비중이 사뭇 다르다. 박 시장이 펼치는 여러 사업들은 따로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두 ‘보행도시’로 귀결된다. 폐고가도로를 랜드마크로 바꾼 ‘서울로 7017’ 변신의 핵심은 남대문과 서울역 일대를 연결하는 ‘보행로 신설’이다. 서울역에서 남대문, 그리고 서울시청과 광화문으로 연결되는 라인은 광화문광장, 청계천, 인사동 등과 함께 서울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서울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우뚝 설 광화문광장의 재구조화 뒷배경에도 ‘보행’이 있다. 박원순 시장이 광화문광장 재구조화에 나선 근본 목적은 걸을 수 있는 광장이다. 광장의 모양을 조금 변경한다던가 교통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것과는 아예 거리가 멀다. 보행로가 잘 만들어져도 지나는 차량 수가 여전해 공해와 미세먼지가 많다면 시민들이 걷거나 산책용으로 이용하기 힘들다. 광화문광장이 녹색교통지역 한가운데 있다는 점은 이런 점에서 우연이 아니다. 더구나 서울시의 이런 계획에는 현재 사대문 안에만 지정된 녹색교통진흥지역을 확대하는 방안이 포함됐다. 차는 더 다니기 어렵게, 사람은 더 걷기 쉽게 서울시내를 본격적으로 개조하겠다는 구상인 셈이다.

걷기는 인류가 아득한 옛날부터 자동차를 타고 와서 땅 위에 내려서는 중이라고 믿고 있는 우리 시대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인간이라는 종(種)이 두 개의 발로 시작됐으며, 신석기 이래 지금까지 우리 인간들의 능력이 네안데르탈인들의 그것에 비하여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신석기시대 이래 지금까지 인간은 늘 똑같은 몸, 똑같은 육체적 역량, 변화무쌍한 주변 환경과 여건에 대처하는 똑같은 저항력을 갖고 있다. 오만한 오늘의 사회는 그 오만 때문에 호된 벌을 받고 있지만 우리 인간들이 가진 능력은 네안데르탈인들의 그것에 비해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수천 년 동안,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인간들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가기 위하여 발로 걸었고 지금도 걷고 있다. 사실 이는 두 발이라는 특징만 제외한다면 네발동물들 역시 동일하게 적용된다. 두발이든 네발이든 모든 동물은 어머니 대지의 후손이다. 조류도 예외는 아니다. 창공을 나는 새 역시도 대지에서 탄생하고 잠든다.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라고 프랑스의 작가 브르통은 말한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온전하게 경험하는 것이다.

기차나 자동차는 육체의 수동성을 불러오고 세계를 멀리하는 길만 가르쳐 주지만, 그와 달리 걷기는 시간과 공간을 새로운 환희로 바꾸어놓는 고즈넉한 방법이다. 스쳐가는 풍경은 비로소 멈추어 오롯이 나의 공간으로 들어와 나의 시간 속에서 하나가 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호젓한 숲길이나 오솔길을 걸어보라. 약간 빨라지는 심장의 박동과 다리에서 전해져오는 기분 좋은 뻐근함 그리고 연이어 맺혀오는 이마의 땀방울을 통해 온몸의 세포들이 살아 숨 쉬며 활짝 기지개를 켜는 느낌을 체험할 것이다.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빗 소로도 하루에 최소한 네 시간 동안, 대개는 그보다 더 오랫동안 일체의 물질적 근심걱정을 완전히 떨쳐버린 채 숲으로 산으로 들로 한가로이 걷지 않으면 건강과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걷기에 대한 예찬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다. 일본의 시인 바쇼는 오랫동안 세상을 멀리하여 은거하다가 떠나고 싶은 욕구가 마음속에 차오르는 느낌을 이렇게 말했다.

‘어느 해부터인가, 구름조각이 바람의 유혹에 못 이기듯 나는 끊임없이 떠도는 생각들에 부대끼게 되었다. 이윽고 지난해 가을에는 강가에 있는 내 오두막에서 해묵은 거미줄을 쓸어버렸다. 여행신이 내 정신을 흔들고 길신들이 부르는 소리에 나는 찢어진 바지를 꿰매고 모자끈을 고쳐 매고 마쓰시마의 달빛에 마음을 맡긴 채 다른 사람에게 내 거처를 넘겨주었다.’

혼자 길을 걸어본 사람은 홀로 걷는 즐거움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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