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고문이 공개한 민영환 선생 한글 유서
이재준 고문이 공개한 민영환 선생 한글 유서

 

각 공관에게 보낸 서한

‘구천에서도 혼은 죽지 않아’

한지에 붓으로 써…

칙명으로 한글 사용 사례

한국역사문화연구회 공개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1905년 을사늑약에 비분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閔泳煥. 1861~1905) 선생의 육필 한글 유서로 보이는 편지 1통이 발견됐다. 민충정공의 유서는 자결 당시 몸속에서 발견된 명함 유서와 각 공관에 보낸 편지 등 3종으로 알려졌는데 이번에 발견된 유서는 각 공관에 보내진 유서로 추정되며 한글로 쓰인 것이다.

이 편지는 한국역사문화연구회 이재준(전 충북도 문화재 위원) 고문이 서울의 한 수장가의 간찰 속에서 찾은 것으로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공개한 것이다. 선생이 공관에 보내는 유서를 한글로 쓴 것은 당시 고종황제의 칙명으로 각 공관에 보내는 모든 공문이 한글과 한문으로 함께 쓰인 것임을 이 고문은 들고 있다.

이 유서는 24㎝x27㎝ 크기로 한지에 종서로 써내려갔는데 내용은 고려대박물관에 소장된 명함유서와 비슷하나 첫 머리와 내용 일부와 제일 끝부분이 다르다. 한문으로 쓰인 유서는 ‘嗚呼國恥民辱乃至於此(오호국치민욕내지어차)’로 시작되며, 가로 5㎝, 세로 9.5㎝ 크기의 명함 앞뒷면에 연필로 135자를 빽빽하게 썼다.

새 발견 한글 유서는 ‘민보국 유지 경고 한국인인’으로 시작되며 모두 15행으로 되어 있는데 끝 부분은 각 ‘공관 기서(寄書. 각 공관에 편지를 보냄)’가 본문 글씨보다 크게 나타나 있다. 이 고문은 ‘민보국 유지 경고 한국인인(民輔國 維持 警告 韓國人人)’이란 뜻은 ‘한국인들에게 충성을 다하여 국민과 나라를 지키라는 경고’로 풀이했다.

다음은 민충정공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 유서 전문이다.

민보국 유지경고 한국인민

오호라, 나라와 민족의 치욕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우리 인민이 장차 경정하는가. 온대 진멸하는 지라. 무릇 살기를 구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반드시 살아날수 있으니, 이를 어찌 폐릉(斃蔆?. 죽어가는 한해살이 수초. 대한제국 국민들을 지칭함)은 알지 못 하리요.

영환이 한번 죽기를 결단하여 우러러 황은(皇恩)을 갚고, 우리 2천만 동포 형제들에게 사례(謝禮)하노니 영환이 죽어도 죽지 아니하였고 이제 죽어도 혼은 죽지 아니하여 구천에서 여러분을 돕고자 한다.

동포 형제는, 천만 배나 분려(奮勵)를 빼내어 지기를 굳게 하고 학문에 힘써 결심 노력하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할지어다. 그러면 나는 지하에서 기꺼이 웃으련다.

오호라, 조금도 바람을 잃지 말지어다. 영결하여 우리 대한제국 2천만 동포 형제에게 계고 하소라(하노라). -각 공관 기서(意譯)

이 편지를 본 충북대 박걸순 교수(독립운동사)는 “각 공관에 보낸 민충정공의 한글 유서는 처음 대하는 것이며 한글로 쓰인 글로써 주목된다”고 밝혔다.

유서를 공개한 이재준 고문은 “민충정공이 각 공관에 보내는 유서를 한문이 아닌 한글로 보낸 것은 당시 고종황제의 칙명으로 한글에 대한 사용이 의무화됐음 보여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1894년 조선 고종은 갑오개혁에서 한글을 ‘국문(國文)’이라고 공포했으며, 1894년 11월 21일 칙령 제1호 공문식(公文式) 제14조 및 1895년 5월 8일 칙령 제86호 공문식 제9조에서 법령을 모두 국문을 바탕으로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거나 국한문을 섞어 쓰도록 했다는 것이다.

1905년 민충정공이 자결한 해에는 지석영(池錫永)이 상소한 6개항의 신정국문(新訂國文)이 광무황제의 재가를 얻어 한글 맞춤법으로서 공포되기도 했다.

이 고문은 자택에서 자결하기 전 먼저 각 공관에 보내는 유서를 한글로 써 보내고, 순국 당일 명함에 한문으로 유서를 쓴 것으로 해석했다.

명함에 쓰여진 민영환 선생 유서
명함에 쓰여진 민영환 선생 유서

민충정공 약사

충정공 민영환 선생은 1861년 7월 2일 서울 견지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이다. 선생은 고종황제와 내외종간이다. 1877년 동몽교관이 되었으며 이듬해 약관 17세의 나이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87년 선생은 27세의 젊은 나이로 예조판서로 승진하였고 1888년과 1890년 두 차례에 걸쳐 병조판서를 지냈다. 1893년 형조판서, 한성부윤, 1894년 독판 내무부사,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1895년 8월에는 주미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선생은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도 참석했다. 이때 윤치호, 김득련, 김도일 등을 대동하고 러시아로 길을 떠났다. 인천에서 러시아 군함을 타고 상해, 나가사키, 동경을 거쳐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한 선생은 여기서 기차 편으로 북미대륙을 횡단하여 뉴욕으로 갔다. 미국 뉴욕에 3일간 머물렀던 선생은 근대화된 도시와 선진 문물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어 선생 일행은 상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 런던에 도착하였고 유럽 대륙의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를 거쳐 러시아로 들어갔다.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의 각료들을 총칼로 협박,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함으로써 국권을 강탈했다. 민충정공은 을사늑약이 체결될 때 부인의 산소를 이장하는 일로 경기도 용인에 내려가 있다가 소식을 들었다. 비분강개하여 통곡하지 않을 수 없던 선생은 급거 상경하여 11월 27일 의정대신 조병세와 함께 조약 체결에 찬성한 매국 대신들을 성토하고 조약을 파기하도록 상소할 것을 결정하였다.

분을 참지 못한 선생은 11월 30일 오전 6시경, 45세의 나이로 2천만 동포와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 등 3통을 남기고 품고 있던 단도로 목을 찔러 자결, 순국했다. 유서는 ‘대한매일신보’ 1905년 12월 1일자에 실려 항일 운동을 격화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민영환 선생
민영환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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