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칼럼] 역사로 보는 우리사회의 다문화 유래
[다문화 칼럼] 역사로 보는 우리사회의 다문화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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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 JG사회복지연구소 대표

 

한반도는 선사시대부터 북방민족과의 접촉이 빈번해, 주변국가에서 정치적 망명, 피난, 정략결혼 등을 원인으로 귀화인들이 일찍이 등장했다. 귀화인을 조명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가 다양한 이주민의 유입으로 조화를 이루고 교류하며 만들어졌다는 것을 강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환인은 아들 환웅을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로 내려 보내 세상을 널리 다스리게 했다. 환웅은 곰에서 사람으로 변한 웅녀와 혼인을 하게 되고, 천신을 믿는 부족과 곰을 숭배하는 부족의 결합이라 우리 역사상 첫 다문화가정을 탄생시켰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왕검은 문헌상으로 최초의 다문화가정 자녀가 된 셈이다. 단군왕검이 세운 조선은 훗날 고조선이라 불렸고 중국 은나라가 망하자 유목민들과 함께 망명해 집단 귀화한 기자(箕子)로부터 중국 문화를 받아들여 같은 고구려민족 개념으로 문화발전을 위한 포용정책을 펼쳤다.

서기 42년 금관가야에는 황금알 6개가 하늘에서 내려와 처음 사람으로 화한 ‘수로’란 이름이 김수로왕이 됐다. 현재 한국사회의 다문화가정은 대부분 외국인 모(母)가 한국인과 결혼을 함으로써 구성되다보니 이에 비추어 보면 김수로왕과 결혼한 인도 아유타국의 허황옥은 1호 귀화자 결혼이주여성이라 할 수 있다. 15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허황후의 묘가 김해시에 있고 인도에서 가져온 것으로 전해지는 파사석탑이 남아 있어 이를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는 다민족 국가였다. 말갈인들을 포용해 나라를 발전시켰으므로 그들은 고구려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했고 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고구려의 유민들과 함께 발해국을 세웠다. 자발적인 귀화일 경우 같은 고구려 사람으로 대하며 집과 논까지 지원해주는 대우를 했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 발해의 유민들을 귀화인으로 모두 포용하고자 했으며, 군사제도 9서당에 신라의 중앙군으로써 고구려인, 백제인, 말갈인, 정안국인 등 모두 포함했다. 기본적인 권리와 생존권을 보장해 주고 처용가에 따른 서역인도 정착해 살았다는 기록은 아랍권에 남아있다.

고려는 ‘오는 자는 거절하지 않는다’는 적극적 수용원칙의 정책을 펼쳤는데 목적은 인재 확보였다. 인구부족이 심각해지자 외국에 잡혀갔거나 외국으로 흩어졌던 유민을 데려오는 이른바 ‘추쇄정책’을 실시해 이들에게 성을 하사하며 관직을 제수하고 작위를 주었다. 100년 동안 무려 20만 명 가까이 귀화해 210만 인구의 10%에 달하는 큰 숫자를 이뤘다. 그러나 몽골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개방보다는 보수를 택할 수밖에 없었고 고려의 몰락 이후 등장한 조선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외국인들을 다루게 됐다.

그럼에도 외국인의 귀화 행렬은 조선 후기까지 그치지 않았으며 백성확보 차원의 인재등용도 실시됐다. 하멜의 ‘하멜표류기’에는 ‘조선인들은 단지 12개의 국가만 알고 있으며, 세상에 8만 4000여개의 나라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하니 그것을 우화로 여긴다. 그 이유는 태양이 한나절동안 그렇게 많은 나라를 비출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라고 적어 조선이라는 나라는 좁은 세계관과 편협한 시야를 가지고 있다는 비판의 기록을 남겼다. 

현재 한국은 아시아에서 중요한 이주 목적국이 됐으며, 110개국 출신의 한국 귀화자 수가 작년 11월 기준 20만명을 넘어섰다. 난민은 1994년 이후 신청자 5만 5543명 중 난민인정 961명, 인도적 체류허가 2.103명이 난민인정(보호) 받고 있다. 우리의 역사 속 귀화인을 포용한 정책들을 생각하며 타문화에 대한 이해와 수용은 우리 마음을 여는 노력부터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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