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329호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제공:문화재청) ⓒ천지일보 2020.2.21
국보 제329호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제공:문화재청) ⓒ천지일보 2020.2.21

측우 역사 증명해주는 측우대 2점도 지정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우리 옛 과학기술의 꽃인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가 국보로 지정됐다.

21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근대시기 이전의 강수량 측정 기구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 보물 제561호 ’금영 측우기‘를 비롯해 조선 시대 측우(測雨) 제도를 계통적으로 증명해주는 2점의 측우대인 보물 제842호 ‘대구 선화당 측우대’와 보물 제844호 ‘창덕궁 측우대’를 국보로 지정했다.

이 3점의 ‘국보’는 1971년(측우기)과 1985년(측우대) 두 번에 걸쳐 보물로 지정됐으므로 멀게는 근 50년 만에 국보로서 가치가 새롭게 인정받은 것이다.

1442년(세종 24년) 조선에서 강수량 측정을 위해 세계 최초로 측우기와 측우대를 제작한 이후 그 전통이 면면이 이어져왔음을 보여주는 유물들로, 측우기의 경우 1911년 세계 기상학계에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유일하고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이미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국보 제329호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는 조선 시대 충남 지역 감독관청이었던 공주감영(錦營)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1915년 경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 1859~1918)가 국외로 반출한 뒤 1971년 일본에서 환수되어 서울 기상청이 보관해 오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중앙정부에서 측우기를 제작해 전국의 감영에 보냈기 때문에 여러 점이 만들어졌으리라 예상되지만, 지금은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만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의 제작시기와 크기 등에 대해서는 중단의 바깥 면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확인된다.

이러한 측우기의 명문은 15세기 세종대 강우량 측정제도가 19세기까지 계승되어 원칙에 맞게 꾸준히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형체 역시 자세히 보면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상‧중‧하단 총 3개의 금속기로 구성됐으며 미세하게 상부가 넓고 하부가 좁아 서로 끼워 맞추도록 했고 접합부는 대나무 마디처럼 만들어 기형(器形)의 변형을 막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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