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단양 적성비
단양 적성비

단양 적성비는 현존 높이 93m, 폭 1m 7㎝의 크기로 원반 모양의 화강암에 글을 새긴 것이다. 전체 22행, 각행 20자로 전체 450자 내외의 글자 중 288자가 판독되고 있다. 지금까지 학계가 판독한 적성비문은 다음과 같다.

□ □ □ □ □ □ □ □ □ □ □ □ □ □ □ □ □ 阿 城 □ □ □ 1

□ □ □ □ □ □ □ □ □ □ □ □ □ □ □ □ □ 干 在 □ □ □ 2

□ □ □ □ □ □ □ □ □ □ □ □ □ □ □ □ □ 支 軍 □ □ □ 3

□ □ □ □ □ □ □ □ □ □ □ □ □ □ □ □ 喙 鄒 主 夫 □ □ 4

□ □ □ □ □ □ □ □ □ □ □ □ □ □ □ 中 部 文 等 智 豆 月 5

□ □ □ □ □ □ □ 合 弗 □ □ □ □ □ □ 作 助 村 喙 大   中 6

□ □ □ □ □ □ 懷 五 兮 □ □ □ □ □ □ 善 黑 幢 部 阿 智 王 7

□ □ □ □ □ 兄 懃 人 女 □ □ □ □ □ □ 庸 夫 主 比 干   敎 8

智 □ □ □ □ 弟 力 之 道 使 □ □ □ □ □ 懷 智 沙 次 支   事 9

大 人 人 勿 部 耶 使 別 豆 法 子 異 者 公 □ 懃 及 喙 夫 內 干 大 10

烏 石 勿 思 奈 如 人 敎 只 赤 刀 葉 更 兄 □ 力 干 部 智   支 衆 11

之 書 支 伐 弗 此 事 自 又 城 只 耶 赤 鄒 許 使 支   阿 夫 喙 等 12

立 次 城 耽 白 若 此 悅 佃 小 國 城 文 利 死 節 設 干 智 部 喙 13

人 阿 幢   者 其 後 利 舍 女 法 烟 村 之 人 敎 智 支 大 西 部 14

非 尺 主 失 大 生 國   法 烏 中 去   四 是 事 及 沙 阿 夫 伊 15

今 書 使 利 人 子 中 小 爲   分 使   年 以 赤 干 喙 干 叱 史 16

皆 人 人 大 耶 女 如 子 之 兮   之 婁 小 後 城 支 部 支 智 夫 17

里 喙 那 舍 小 子 也 刀 別 撰 雖 後 下 女 其 也 勿 武 高 大 智 18

村 部 利 鄒 人 年   羅 官 干 然 者 干 師 妻   思 力 頭 阿 伊 19

村 文 耶 少 次 兮 賜 支 伊 公 支 文 三 次 伐 智 林 干 干 20

□월에 왕이 대중등(大衆等)인 탁부(喙部) 출신의 이사부지(伊史夫智) 이간지(伊干支), 사탁부(沙喙部) 출신의 두미지(豆□智) 피진간지(□□干支), 탁부(喙部) 출신의 서부질지(西 夫叱智) 대아간지(大阿干支), 부지(夫智) 대아간지(大阿干支), 내례부지(內□夫智) 대아간지(大阿干支), 고두림성(高頭林城)에 있는 군주(軍主)들인 훼부(喙部) 출신의 비차부지(比次夫智) 아간지(阿干支), 사훼부(沙喙部) 출신의 무력지(武力智) 아간지(阿干支), 추문촌(鄒文村) 당주(幢主)인 사탁부(沙喙部) 출신의 도 설지(□設智) 급간지(及干支), 물사벌(勿思伐) 당주(幢主)인 탁부(喙部) 출신의 조흑부지(助 黑夫智) 급간지(及干支)에게 교(敎)하시었다. 이때에 적성(赤城) 출신의 야이차(也□次)에게 교(敎)하시기를 중에 옳은 일을 하는 데 힘을 쓰다가 죽게 되었으므로, 이 까닭으로 이후 그의 처(妻)인 삼(三)에게는 이(利)를 허(許) 하였다. 사년(四年) 소녀(小女), 사문(思文) 공형(公兄)인 추문촌(鄒文村) 출신의 파진루(巴□婁) 하간지(下干支) 전(前) 자(者)는 다시 적성연(赤城烟)으로 가게하고 후자(後者) 공형(公兄)은 이엽(異葉) 이건 국법(國法)에는 분여(分與)하지만 비록 그러하나 이(伊) 자(子), 도지(刀只) 소녀(小女) 오례혜(烏□兮) 찬간지(撰干支) 법(法)을 적성연사법(赤城佃舍法)으로 만들었다.

별도로 관(官)은 불혜(弗兮) 여(女), 도두지우 열리파(道豆只又悅利巴) 소자(小子), 도나혜(刀羅兮) 합하여 5인에게 내렸다. 별도로 교(敎)하기를 이후로부터 나라 가운데에 야이차(也□次)와 같이 옳은 일을 하여 힘을 쓰고 남으로 하여금 일하게 한다면 만약 그가 아들을 낳건 딸을 낳건 나이가 적건 형제이건 이와 같이 아뢰는 자가 대인(大人)인가 소인(小人)인가 부(部) 출신의 나불탐사실리(奈弗耽□失利) 대사(大舍), 추문(鄒文)[촌(村)] 물사벌성 당주사인(勿思伐城幢主使人)은 니리촌(那利村) 인(人)은 물지차(勿支次) 아척(阿尺), 서인(書人)은 탁부(喙部) 출신의 인(人), 석서립 인(石書立人)은 비금개리촌(非今皆里村)사람이다.

단양 적성에서 발견한 와편
단양 적성에서 발견한 와편

신라의 적성 공략에 참여한 장군들은 경주 귀족세력과 가야 망명세력인 무력(武力) 등이었다. 문헌이 아닌 금석문에서 신라 장군 무력(武力)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적성비가 유일하다. 무력은 진흥왕대 중용되어 적성을 장악하고 충주를 공략하였으며 한강을 점령하여 군주로 군림하게 된다.

무력이 등장하는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본기 4 진흥왕조>에 ‘5년 가을 7월… 백제왕 명농(성왕)이 가량(伽耶)과 더불어 관산성을 공격하므로,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마주 나가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자, 신주 군주 김무력이 주병을 이끌고 와서 교전함에 이르러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갑자기 쳐서 백제왕을 죽이었다. 이에 제군이 승기를 잡고 크게 쳐 이기고, 좌평 4인과 사졸 2만 9600인을 베어 죽이니 말 한 필도 살아 돌아간 것이 없었다(十五年秋七月…百濟王明 襛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 伊湌耽知 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 戰 裨將三年山郡高干都刀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大克之 斬佐平四人 士卒二萬九千六 百人 匹馬無反者).’

<삼국사기 권제41 열전 1 김유신조>에는 ‘김유신은 왕경 사람이다. 12세조 수로는 어떤 사람인지를 모른다. … 조부 무력은 신주도 행군총관이었는데,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왕과 그 장수 4인을 잡고, 머리 1만여 급을 베었다(金庾信 王京人也 十二世祖首露 不知何許 人也…祖武力爲新州道行軍摠管 嘗領兵獲百 濟王及其將四人 斬首一萬餘級).’

여기에 나오는 인물 이사부(異斯夫)는 어떤 인물일까. <삼국사기> 기록을 종합해 보면 신라 내물왕 4대손으로 지증왕, 진흥왕 때 군주·병부령 등을 지냈으며 신라 영토 확장의 일등 공신이다. 이사부는 지증왕 6년 하슬라주(현재의 강릉)의 군주로 임명된 7년 후인 지증왕 13(512)년에 우산국을 정복하였다. 그는 우산국 해안까지 나무로 만든 사자를 배에 싣고 가서 우산국 사람들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사자를 풀어 모두 죽게 하겠다고 협박함으로써 순순히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이사부는 진흥왕 2(541)년에는 신라의 관직 중 2번째 등급인 이찬이 되었고, 545년에는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國史)를 편찬하도록 하였다. 이사부는 군직은 물론 내정에도 크게 기여한 특출했던 인물이었다. 무력과 이사부 등 당대 제일의 무장들이 총출동하다시피 하여 적성의 전역을 친 것은 이 성이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증명하고 있다. 고구려도 이 성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완강히 저항했을 것으로 상정된다. 두 성이 점령되자 진흥왕은 교서를 발표하고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적성비를 세운 것이다.

단양 적성에서 발견한 와편
단양 적성에서 발견한 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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