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신라 진흥왕이 빼앗아 단양적성비 세워

단양 적성
단양 적성

붉은 새, 삼족오가 지킨 ‘적성’인가

동쪽 국토의 끝에 위치한 신라가 북방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개척한 길은 죽령(竹嶺)과 조령(鳥嶺)이었다. 두 고개가 모두 충북 땅이다. 죽령은 지금의 충북 단양 대강면 용부원리이고 조령은 충주 상모면 하늘재다. 단양은 경상도 풍기와 접하고 충주는 문경과 접한다.

신라는 일찍이 2세기 중반에 서둘러 죽령을 개척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아달라왕(阿達羅王) 5(158)년 3월에 비로소 죽령 길을 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이 죽령길을 개척 하고 지쳐서 순사(殉死)했다. 고개마루에는 죽 죽을 제사하는 사당(竹竹祠)이 있다’고 했다. 2세기 중반이면 신라가 가야를 통합하지 못하고 주변에 여러 소국들과 각축하던 시기다. 그런데도 신라는 죽령, 조령을 개척했다. 이 고개의 중요성을 이미 간파했기 때문이다.

죽령은 소백산맥(小白山脈)의 도솔봉(兜率峰, 1314m)과 제2연화봉(1357m)사이에 위치한 중요 교통로로 해발 689m의 고개다. 지금은 5번 국도, 중앙선 철도가 지나가고 있으며 국내에서 가장 긴 터널인 중앙고속도가 죽령터널로 뚫려있다.

그런데 신라는 5세기 고구려의 남방공략으로 죽령을 잃게 된다. 장수왕~문자왕 대 충주지 역인 국원을 백제로부터 빼앗은 고구려는 파죽지세로 죽령까지 영역을 넓히며 신라국경을 넘본 것이다. 죽령과 인접한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에 소재한 적성(赤城)은 죽령을 지켰던 고구려의 거점이 된다.

고구려는 왜 적성이라고 부른 것일까. 이 이름 속에 고구려의 비밀이 숨겨진 것은 아닐까. ‘적(赤)’은 빨강색이다. 글자를 풀이하면 대(大)와 불(火)을 조합한 것으로 바로 태양을 상징 한다. 중국의 한자자전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보면 적(赤)은 ‘남방의 색이다’라고 했다. 회 남자(淮男子) 천문훈은 하늘의 오성을 설명하면서 ‘남방은 불이며, 그 왕은 염제(炎帝) … 그 짐승은 주조(朱鳥)’라고 했다.

이 기록을 봐도 ‘赤’은 태양을 상징하며 그 안에 사는 짐승을 주조(朱鳥)라고 한 것이다. 주 조는 바로 태양에 산다는 전설의 새 ‘삼족오(三足烏)’가 되는 것이다. 붉은 색은 고구려인이 사랑한 색이며 삼족오는 천제의 아들 주몽이 건국한 고구려의 앰블럼이다. 고구려인들은 이곳을 통해 한반도 최남단 소백산 주요 교통로를 장악·경영하려 했던 강력한 의지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죽령을 신라로부터 지키려 했던 고구려. 그러나 신라는 진흥왕 대 군사력을 총 동원하여 이 길을 다시 찾으면서 운명은 반전된다. 7세기 초반 고구려 영양왕은 사위 온달과 평강공주를 출전시켜 이 일대의 실지회복에 나섰지만 끝내 숙원을 이루지 못했다.

오늘은 고구려가 100여 년을 점거하면서 신라와 대치했던 남단 보루 적성을 여행해 본다. 과연 여기에는 어떤 흔적들이 남아 있을까.

김정호 '대동여지도'에 나온 죽령과 단양 옛길(출처: 이재준 역사연구가)
김정호 '대동여지도'에 나온 죽령과 단양 옛길(출처: 이재준 역사연구가)

적성에서 발견된 국보 신라 척경비

1978년 1월 8일 필자는 단국대 정영호 박사가 내려와 조사 중인 단양을 찾았다. 정 박사는 약 5일간 일정으로 단양지역의 고적을 조사 중이었다. 당시는 비포장길이어서 청주에서 단양으로 가는 교통편도 좋지 않을 때였다. 저녁나절이 돼서야 필자는 단국대 조사단이 있는 구 단양 여인숙(지금은 수몰지역)을 찾을 수 있었다.

여인숙에 도착했을 때 정 박사와 단국대학 고 차문섭 박사 그리고 고 이종석 중앙일보 문화 부장(나중에 호암미술관장)이 나를 반겨 맞이해 주었다. 그런데 이들의 얼굴에 웃음이 그치 지 않았으며 내일 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정 박사도 매우 중요한 것이 찾아 졌다고만 하였다. 아침 9시 쯤 조사단은 적성을 올라갔다. 1월이라고 해도 날씨는 따뜻했으며 백설이 군데군데 쌓인 적성은 매우 질척거렸다. 등산화에는 흙이 많이 묻었다. 산성 중턱쯤 올랐을 때 나뭇가지로 가려 놓은 널찍한 암반을 볼 수 있었다. 이 자리에 멈춰선 정 박사는 떨리는 손으로 나뭇가지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평평한 암반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각자되어 있었다. 정 박사는 상기된 얼굴로 “이 비석은 신라 진흥왕 척경비 즉 순수비”라고 말했다. 입을 다물고 있던 여러 사람들이 그제야 파안대소하며 또 하나의 국보급 진흥왕 순수비가 찾아진 것이라고 거들었다. 특종 중의 특종이었다.

정 박사는 글자를 짚어가며 비문에 대한 해석을 해 주었다. 신라 진흥왕 대 적성을 탈환하면서 기념으로 이 비를 세운 것이며 당시 전쟁에 나섰던 신라 장군 이사부, 무력들의 이름이 나온다고 했다.

국보 제198호 단양적성비가 찾아지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수년 동안 충북산하를 답사하며 고생한 단국대학교 정영호 박사의 큰 업적이었다. 당시 이 조사에 참여했던 젊은 학생들 이었던 조사단 장준식, 박경식 씨는 이제 한국 불교사학회 원로가 되었다. 장준식 교수는 충 북문화재연구원장으로 박경식 교수는 단국대 석주선박물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당시 이 소식을 접한 한학자 고 임창순 선생은 중앙일보에 비의 성격과 가치를 설명하면서 ‘정영호 박사의 위공(偉功)’이라고까지 평가했다. 지금은 당시 비를 발견했던 정 박사는 물 론, 호탕하며 애주가였던 차문섭 박사, 유머가 많았던 이종석 부장도 모두 고인이 되었다. 40년이 넘은 세월이 되었으니 한 분 두 분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단양 적성비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그리운 이들이다.

조유전 박사(고고학자. 전 문화재연구소장)는 적성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단양 신라 적성비(이하 적성비)’의 발견 소식에 학계는 흥분했다. 그럴 만했다. 금석문(金石文)이란 당대 사람들이 직접 쇠(金)나 돌(石)에 새긴 글(文). 그러니 1차 사료로서의 가치는 말할 나위가 없다. 당대의 문화 및 사회상을 생생한 필치로 읽을 수 있으니…. 특히 후대의 자료일 수밖에 없는 역사서(삼국사기 등)를 보충하고, 그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다. 2월 25일 김원룡·김석하·남풍현·이기백·임창순·변태섭·황수영·이희승·이병도·진홍섭·최순우·권오순·최영희·김정기·김동욱 등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총출동, 학술좌담회를 열었다. 금석학자인 임창순 당시 태동고전연구소 장은 ‘비문은 가장 난해한 문장’이라면서 ‘향찰식(鄕札式)도, 한문식도 아니어서 해독에 어려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진흥왕이 이사부와 비차부, 무력 등 10명의 고관에게 하교하여 신라의 척경(拓境)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 사람 야이차의 공을 표창했고, 후에도 야이차처럼 충성을 바치면 포상을 내리겠다는 것이다. 진흥왕 순수비 정신의 최초의 표현이다(변태섭 당시 서울대교수). 즉 신라 진흥왕이 죽령을 넘어 고구려 땅이던 적성(赤城, 단양)을 점령한 뒤, 즉 충청문화권에 진입하면서 새로운 마음으로 민심을 위무하는 차원에서 신라의 척경을 돕고 충성을 바치는 사람에게 포상을 내리겠다는 국가정책의 포고라는 것이다(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 2008. 9.19 경향신문).”

단양 적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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