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의 문화 찔러보기] 자장면과 짜파구리
[전경우의 문화 찔러보기] 자장면과 짜파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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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우 작가 문화칼럼니스트

 

우리나라에 중국 음식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1882년 임오군란 때 중국 군인들과 상인들이 대거 들어오면서다. 일제 말기 우리나라에 거주한 화교가 6만 5천명 정도 됐고, 중국 음식점은 300여개였다. 당시 중국 음식점의 고객은 주로 중국인들이었고, 한국인들도 가끔 찾기는 했으나 그 수가 많지 않았다. 

해방이 되고 정부에서 화교들의 무역을 금지하자 화교들은 일자리를 잃게 됐고 설상가상 중국 본토가 공산화 되는 바람에 돌아갈 수도 없게 됐다. 화교들은 궁여지책으로 음식점을 차렸다. 큰 돈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게 음식점이었다. 해방 후 3년이 지나자 중국 음식점은 1700여개로 늘어났다. 화교들은 향료를 줄이고 매운 맛을 가미하는 등 한국사람 입맛에 맞는 중국요리를 내놓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과 함께 농촌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자장면은 직장인들에게 최고의 외식거리였다. 싼 가격에 양도 넉넉하고 맛도 좋아 인기가 높았다. 무엇보다 배달을 시켜 먹을 수 있어 편리하기까지 했다. 전화기를 들고 자장면을 주문하는 것은 남들 눈에는 제법 그럴듯한 풍경이었다. 

자장면이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값이 싼 밀가루 덕분이었다. 우리나라는 원래 쌀농사를 주로 했기 때문에 밀가루 음식은 많지 않았다. 밀가루 값도 비쌌다. 그런데 미국에서 잉여 농산물로 값싼 밀가루가 들어오면서 중국집에서도 자장면을 저렴한 가격에 내놓을 수 있게 됐다. 마침 정부에서도 분식 장려 운동을 벌이면서 자장면의 대중화가 더 빨리 이뤄졌다. 

1인당 국민소득이 3천 달러가 되면 외식 산업이 본격화 한다는 말이 있다. 198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우리나라도 1인당 국민소득 3천 달러 시대를 맞게 됐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 올림픽을 거치면서 외국의 패스트푸드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본이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면서 일본 음식에 대한 선호도도 높아졌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고기집도 많이 생겨났다. 불고기나 갈비는 양반집에서나 먹던 귀한 음식이었지만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시절이 온 것이다. 무슨 무슨 가든, 하는 것도 생겨났다. 자동차가 널리 보급되면서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야외 고기 집을 찾는 것이 유행했다. 막국수와 닭갈비, 아귀찜, 보리밥, 밀면 등 서민들이 먹던 음식들이 향토 별미 음식으로 대접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먹을 것도 많아졌지만, 그럼에도 자장면 사랑은 변함이 없다. 입학식 때도, 졸업식 때도, 생일에도 먹었던 자장면을 아직도 먹고 있다. 

집에서 만들어 먹는 일회용 자장면이 나온 지도 꽤 오래 됐다. 자장라면과 그냥 라면을 섞어 만든 짜파구리가 큰 인기를 모았고 여기에 대항하는 불타는 자장면 같은 것도 등장했었다. 그 짜파구리가 요즘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영화 ‘기생충’ 덕분이다. 영화에서는 짜파구리에 한우 채끝살이 올라간다. 부잣집 아이가 먹는 짜파구리인 것이다. 누가 먹는 짜파구리든, 아무튼 누구나 차별 없이 자장면을 먹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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