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역사 속에 잊혀진 종친부 변천사 재조명(9)
[박관우 칼럼] 역사 속에 잊혀진 종친부 변천사 재조명(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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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924년 4월 15일 각의(閣議)를 거쳐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이하 ‘경성제대’) 관제(官制)는 5월 2일 공포(公布)가 됐으며, 1925년 8월 14일 경성제국대학 부지(敷地)에서 2년을 목표로 교사신축 공사가 착공됐다.

이와 관련해 경성제대의 설계는 총독부 토목국 건축과 기사가 담당했으며, 양식은 로마네스크식으로 콘크리트 조에 벽돌로 벽을 쌓고 외부는 황갈색의 타일을 붙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1927년 6월 27일 조선총독부 학교 관제가 제정돼 경의전(京醫專)과 총독부의원(總督府醫院)의 관계가 완전히 분리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결과로 경성제대에 의학부(醫學部)가 신설되면서 총독부의원이 경성제대 부속병원(京城帝大附屬病院)이 되었으며, 동시에 대부분의 교수진을 포함하여 장비와 참고서 약품들까지 경성제대 의학부로 흡수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한편 1926년 경성제대에서 수업을 시작하면서 경의전 학생들의 반발은 심해졌으며, 결국 해결책을 마련되었는데, 구체적으로 경의전은 임상 의사의 양성에 기초를 둔 교육을 하고 경성제대는 의학 연구에 주력하는 교육을 하기로 하면서 학생들의 반발은 더 이상 확산되지 않았다.

1928년 5월 28일에 학교 관제 일부가 재개정돼 경의전 부속병원 설치가 결정됐으며, 당시 사이토 원장은 병원의 부지로 여러 장소를 물색하다가 최종적으로 종친부(宗親府)가 있던 소격동(昭格洞)으로 결정하면서 종친부가 일본군(日本軍) 수도육군병원(首都陸軍病院)에 이어서 다시 경의전 부속병원(京醫專附屬病院)으로 이어지는 상황으로 전개됐다.

1928년 11월 29일 소격동에 2층 규모의 부속의원이 신축 개원되었는데, 이 공사를 하는데 있어서 10만원의 건축비와 10만원의 설비비를 포함하여 총 20만원의 자금이 투입됐다.

이와 관련해 당시의 상황에 대해 동아일보 1928년 12월 2일자 기사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관립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인 총독부 의원은 대학부속병원으로 되어 버리고, 의전부속병원은 소격동 165번지 종친부 터의 일부에 10만원의 건축비와 10만원의 설비비를 들여 우선 일반치료에 응하도록 모든 준비를 하고 의사들도 내과로 유명한 의학박사 成田 원장을 비롯하여 임재명, 정의택, 평강씨 등 유명한 의사가 있으며, 외과에는 경험이 풍부한 백린제 박사, 굴천 씨 등이 있으며, 피부과에는 오원석씨 등 상당한 의사가 치료를 하게 되었으며, 병실도 특등 이하 3 등까지 완비되고 요금은 대학병원의 3 분의 2 밖에 되지 않고 약값은 한 제에 15 전 밖에 받지 않는데 모든 것이 영리를 도외시하고 환자 본위 이므로 환자의 대우에 특별히 주의한다는데 외과 수술실에 설비한 무영 조명등 같은 것은 세계를 치고도 몇백개 밖에 되지 않는 고가의 완전한 것이라 한다. 교통이 전차 길에서 거리가 있으므로 안국동 네거리와 총독부 앞에는 병원 자동차를 기다리게 하여 일반 환자를 무료로 태운다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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