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오늘은 유교사회 ‘언로(言路)’라는 용어를 곱씹어 본다. 제왕과 신하 사이에 있어야 할 소통을 이같이 지칭했다. 언로는 통치자의 의무감 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민주사회인 지금보다도 치자(治者)에게 강요된 도덕률 중 하나였다.

언로를 활짝 여는 것이야말로 제왕의 덕목이었다. 언로를 듣기 싫은 간섭으로 생각하면 간관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그들은 임금을 폭군에 비유하고 때로는 목을 내놓고 시정을 요구했다.

조선시대 언로는 주로 상소문(上疏文)이 매개 역할을 했다. 일개 시골의 선비라 해도 임금이 상소를 받으면 무시하지 못했다. 비위에 거슬리는 글이 있어도 벌을 주지 못했다. 춘추관에서는 상소가 전달되면 누가, 언제, 어떤 내용인가를 살펴 빠짐없이 사초에 기록한다.

만약 임금이 상소한 자를 잡아 신문이라도 하게 되면 간언들이 앞을 다투어 들고 일어났다. ‘임금이 언로를 막으면 독재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조선왕조 역대 임금 중에서 상소를 받고도 감정을 끝내 억제한 현군은 세종이다. 궁중에 불당을 지으려 할 때 신하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임금의 덕을 비난하고 극력 반대했다. 상소한 자를 당장 잡아들이라고 호통을 치고 싶어도 감정을 억제했다. 임금에게 바른 소리하는 근신들이 나서 말렸기 때문이다.

반면 폭군들은 언로를 수용하지 않았다. 연산군은 자신에게 올바른 소리를 하는 원로 환관 김처선을 궁중에서 칼로 난자해 죽였다. 이 사건 이후 조정 신료들이나 간관마저 상소를 하지 않았다.

제 잘못을 모르는 연산은 더욱 횡포해졌으며 흥청망청 기분 내키는 대로 살다 실각했다. 강화도로 귀양을 간 연산군 일가는 어린 왕자들까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는 선조 2년(1569년)에 ‘나라의 재앙을 막는 계책으로 임금에게 올린 다섯 가지 조목(陣弭災五策箚)’에서 언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예부터 잘 다스려진 나라에서는 말을 바르게 해야 하고, 도가 행해지지 않는 나라에서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무도한 나라에서 바른말을 했다가 화를 입을까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바른말 때문에 화를 입을까 걱정해야 하는 나라는 이미 바른길을 잃은 나라입니다…(하략)….’

현군 정조는 남을 비난하는 상소를 배척해 언로가 막히자 후회하는 교시를 내린다. ‘언로(言路)가 요즘처럼 막힌 적이 없었다… 이것이 실로 한탄스럽다’고 개탄했다.

독재자들은 비판 언론에 재갈을 물려 언로를 막았다. 그러나 비판이 없으니 썩을 대로 썩어 나중에는 회생불능상태가 되고 말았다. 루마니아 독재자였던 차우체스크는 스탈린의 지배방식보다 지독한 독재로 언론을 탄압,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았는가.

중국 우한(武漢)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도 발생 초기 철저하게 대응했으면 지금의 큰 확산은 막을 수 있었다. 언론 통제가 사태를 더욱 키운 셈이다. 우한이 포함된 후베이지역은 최근 하루 만에 확진자가 1만 4840명, 사망자가 242명 각각 늘었다. 병상 증세 확진 기준을 늘렸기 때문이다. 당국이 발표한 숫자보다 10배가 많다는 설이 사실로 확인 된 셈이다.

언론의 자유가 억지되는 국가, 사회는 미래가 없다. 현 정부도 항상 경각심을 갖고 ‘언로가 막혔는지’를 돌아 봐야 한다. 집권여당이 모 신문에 비판한 글을 쓴 교수를 고발한다는 방침을 세웠다가 여론이 들끓자 철회했다. 4.15 총선에 출마한 여당 후보들마저 강력 반대한 것이다. 진정 활발한 언로가 보약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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