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심모원려(深謀遠慮)
[고전 속 정치이야기] 심모원려(深謀遠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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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병약했던 장량은 군사작전을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방의 참모로 활약했다. BC204년, 항우에게 형양(滎陽)에서 포위된 유방은 공포감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역이기(酈食其)가 항우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대책을 건의했다. 그는 상의 탕왕이 하걸을 멸한 후 하의 후예를 기(杞)에 봉하고, 주무왕이 은주를 토벌한 후 은의 후예를 송(宋)에 봉했으나, 진은 6국을 멸한 후 자손들을 모두 제거했다가 반발을 초래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6국의 후예들과 연합하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장량의 생각은 달랐다.

“형세를 따져보겠습니다. 은의 탕왕은 걸을 사지에 몰아넣을 수가 있다고 판단하여 그 후손을 기국에 봉했습니다. 6국의 후예와 연합하여 항우를 사지에 몰아넣을 수 있습니까?”

유방이 불가하다고 대답하자 장량은 말을 계속이었다. “그것이 불가한 첫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이 은의 후예를 송에 봉한 것은 주왕의 목을 얻을 수가 있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왕께서 지금 항우의 목을 얻을 수가 있습니까?”

유방이 불가하다고 말하자 장량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2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은 은의 도읍으로 들어갈 때 하옥된 기자(箕子)를 석방하고, 비간(比干)의 무덤에 봉토했습니다. 지금 그렇게 문호를 개방할 수 있습니까?”

유방이 불가하다고 말하자 장량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3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이 재물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것처럼 할 수 있습니까?”

유방이 불가하다고 말하자 장량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것이 4번째 이유입니다. 은을 멸한 주무왕은 무장을 해제했습니다. 다시는 무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문치를 추진하고 무력을 사용자 않을 수 있습니까?”

유방이 불가하다고 말하자 장량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5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은 은나라를 멸한 후 전마를 모두 풀어놓고 다시는 군사행동에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유방이 불가하다고 말하자 장량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6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은 군대에서 수송용으로 사용한 소를 모두 백성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지금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유방이 불가하다고 말하자 장량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것이 7번째 이유입니다. 천하의 호걸들이 고향을 떠나 대왕을 따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천하를 평정한 후 작은 땅덩어리라도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6국의 후예를 봉하면 그들은 모두 떠납니다. 대왕은 누구와 함께 천하를 다투겠습니까? 그것이 불가능한 마지막 이유입니다. 역이기의 계책을 따른다면 대왕의 대업은 허사로 돌아갑니다.”

유방은 입 안에 있던 음식을 도로 뱉으며 하마터면 대사를 그르칠 뻔했다고 후회했다. 진시황은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군현제도를 시행했다. 역사발전의 추세와 부합되었지만, 모든 사물은 발전과정에서 기존가차의 저항을 받는다. 이를 무시하고 단칼로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다. 진시황이 죽은 후 진이 허무하게 무너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항우가 진을 멸한 후 분봉한 것은 역사발전의 역행이었다. 게다가 분봉의 대상은 모두 그의 측근들이었다. 많은 동조세력에게는 불공정한 처사였다. 장량은 신진세력을 기반으로 정권을 구축하려고 했다. 교류가 확대된 중국은 중앙집권이 필요했고, 강성해진 이민족을 막아야 했다. 장량은 이러한 대내외 환경의 변화를 직시했다. 심모원려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세상의 변화와 국제적인 환경의 추이를 모르는 자들이 논할 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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