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도원리 연화문 와당
도원리 연화문 와당

아무래도 동진(東晉)시기 시인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고대 중국 후난성(湖南省)의 무릉(武陵)이라는 지역에 한 어부가 살고 있었다. 어부가 물고기를 잡기 위해 강을 따라 계곡 깊숙이 들어갔다. 어디쯤 왔을까.

길을 잃은 어부는 무작정 노를 저었다. 그런데 계곡 양쪽 물가를 따라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자세히 살피니 복숭아꽃이었다. 향기가 계곡에 가득 찼으며 바람결에 복숭아꽃이 비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어부는 이 복숭아나무 꽃에 매료되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작은 동굴이 있었다. 어부는 호기심에 기슭에 배를 두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동굴 안으로 계속 들어가자 갑자기 넓은 땅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논밭과 아름다운 연못이 있었다. 그리고 뽕나무와 대나무 숲도 있었다. 개나 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도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데 노인이나 아이들의 얼굴 표정은 즐거운 모습이었다.

마을 사람이 어부를 발견하고 의아하여 도대체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어부가 겪은 그대로를 이야기하자 마을 사람은 집으로 어부를 데리고 가 잘 대접해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집으로 몰려왔다. 사람들은 아래 세상에 대해서 이것저것 어부에게 캐물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우리는 진(秦)나라 때 전란을 피해서 가족과 친지들을 이끌고 이 산속으로 피난을 왔습니다. 그 후로는 마을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과는 인연이 끊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시대입니까?”

사람들은 대략 500년 동안이나 바깥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어 한(漢)이라는 나라도 몰랐다. 마을 사람들은 번갈아가면서 어부를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해서 푸짐한 술과 안주로 대접하며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어부는 이 마을에서 며칠 동안을 지낸 후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자 마을 사람 중 하나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마을에 대해서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아주시오.”

어부는 마을을 나와서 원래 장소에 있던 배를 타고 오면서 도중에 표시가 될 만한 곳을 눈 속에 넣고 마을로 돌아왔다. 어부는 마을 관리에게 ‘무릉도원’을 보고했다. 관리는 어부에게 부하를 동행시켜서 마을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도원리 마을을 들어가니 민가 마당에 놓여 있는 장대석형의 돌이 취재반을 맞는다. 그 옆에는 바로 ‘도원(武陵桃源)’이란 큰 글씨가 음각된 표지석이 서있다. 이 표지석은 또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취재반은 주위에 흩어진 많은 기와조각을 찾았다. 아! 이곳이 바로 절터였구나. 절은 대체 언제 지어졌으며 어느 시대까지 향화(香火)를 올린 것일까.

절터의 중심 유지는 현재 도원리 마을이 있어 확인할 수 없다. 절터는 매우 크며 동네 뒷산 마을 왼편의 경작지 등에서도 많은 양의 와편이 발견된다.

괴산 도원리 절터 추정지
괴산 도원리 절터 추정지

청천을 지킨 고구려 가람터

취재반은 기와를 조사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기와 가운데는 붉은색의 와편이 가장 많았다. 격자문(格子紋)이나 사격자문(斜格子紋), 혹은 승석문(繩蓆文) 와편도 찾아졌다. 고구려 산성이나 절터에서 많이 찾아지는 와편이었다. 경상도 땅 상주 가까운 청천까지 고구려 향기를 느끼게 되다니 감회가 새롭다. 고구려는 어떤 건물을 지었을까. 고대 중국 진 나라 진수(陳壽 233~297)의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궁실을 잘 짓고 그 안에 살면서 궁실의 좌우에 큰 집을 지었는데, 오른쪽에는 사직을 지어 하늘과 땅에 제사 지냈다(好治宮室 於所居之左右立大屋 祭鬼神 又祀靈星社稷).”

고구려의 궁전 건축이나 불교 사찰 건축에는 대부분 붉은 기와를 사용했다. 이는 벽사(辟 邪)의 의미도 있지만 건축물을 장엄하게 보이려는 뜻도 있었다. 온도를 높여 검게 나온 기와들은 붉은 주칠을 했다. 고구려 벽화에도 기와에 주칠을 한 건축물이 보여 이 같은 사실을 입증한다.

특히 주목을 끄는 기와로는 이형 와당과 토제 장식 등이다. 고구려 초기 와당은 한나라 영향을 받아 권운문(卷雲紋)이 유행했다. 이 시기 설화 속에 등장하는 삼족오(三足烏)를 비롯해 두꺼비문·주작문·동물문이 등장했다. 특히 치우상(蚩尤像)인 인면문(人面紋)은 매우 주목된다. 이 인면문은 후에는 용면(龍面)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필자는 2018년 서울의 박성수 씨가 소장한 ‘고구려 와전’을 조사하여 책으로 발간했는데 그 안에 이형와당, 토제 장식 등을 소개한 바 있다.)

고구려 와당의 제작은 불교전래 이후 연꽃무늬로 주종을 이룬다. 연꽃무늬는 힘이 차며 연판은 짧은 대신 4엽, 6엽 혹은 12엽이 되는 것도 있다.

필자는 30년 전 이 절터를 조사하면서 매우 특이한 형태의 와당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신라나 백제 것이 아닌 특별한 문양의 것이었다. 날카로운 연꽃, 깊은 주연은 삼국시대의 것이나 북방요소가 짙은 것이었다(도판의 이 기와는 고구려 문양을 회고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괴산군은 본래 고구려의 잉근내군(仍斤內郡)이었다. <여지승람 괴산군조>를 보면 신라에서 괴양군(槐壤郡)으로 고치고, 고려에서 괴주(槐州)로 개명한 것으로 나온다. 괴산군에서 계립령(鷄立嶺)이 있는 연풍현은 동쪽으로 22리가 된다. 계립령은 바로 고구려 평원왕 당시 실지 회복을 위해 평양을 떠나면서 각오를 다진 온달장군의 고사에 나오는 장소다.

<여지승람 연풍현 산천 계립령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계립령은 시속에 마골재라고 한다. 현 북쪽 43리에 있다. 고구려의 온달이 말한 계립현 죽령 서쪽이 돌아오지 않으면 나도 돌아오지 않겠다고 한 곳이다(俗傳 麻骨岾 在 縣址 四十三 里 高句麗 溫達所謂鷄立峴竹嶺以西不歸於我 則不返也此基地).”

죽령 서쪽의 땅은 바로 괴산군 일대로서 청천이 포함된다. 고구려는 신라에 빼앗긴 이 지역 탈환이 국가적 염원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제45권 열전 제5(三國史記 卷第四十五 列傳 第五)>에 기록된 온달과 계립령에 관한 기사는 다음과 같다.

양강왕(陽岡王)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었다. “지금 신라가 우리의 한수 이북의 땅을 차지하여 자기들의 군현으로 삼으니, 그곳의 백성들이 애통하고 한스럽게 여겨 한시도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사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저를 어리석고 불초하다 여기지 마시고 병사를 주신다면 한번 쳐들어가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나이다.”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온달이 길을 떠날 때 맹세하며 말했다.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우리에게 되돌리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으리라.”

온달은 아단성(阿旦城) 밑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서 죽고 말았다. 장사를 지내려 하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가십시다.” 드디어 관을 들어 묻을 수 있었다. 대왕이 이를 듣고 비통해하였다(前略...嬰陽王 卽位 溫達奏曰 惟新羅 割我漢北之地 爲郡縣 百姓痛恨 未嘗忘父母之國 願大王不以愚不肖 授之以兵 一往必還吾地 王許焉 臨行誓曰 鷄立 峴竹嶺已西 不歸於我 則不返也 遂行 與羅軍戰 於阿旦城之下 爲流矢所中 路而死 欲葬 柩不肯 動 公主來撫棺曰 死生決矣 於乎 歸矣 遂擧而 窆 大王聞之悲慟).

온달(溫達)과 평강공주의 로맨스는 유명한 고사로 회자된다. 온달은 용모가 우스꽝스럽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매우 정직했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발을 걸치고 시정(市井) 사이를 왕래하고 다녔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

두 주인공의 결합은 고구려 사회의 평등관을 대변해 준다. 공주가 일개 하천 집안의 총각과 혼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산상왕(山上王)이 주통촌의 여자와 관계하여 왕자를 낳은 고사와 비견된다. 모계 중심으로 철저히 혈통을 중시했던 신라 왕조사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어쨌든 청천은 7세기 이후 고구려가 다시 회복하려한 땅이었다. 그러나 온달이 아단성(阿旦城)에서 패전, 전사함으로써 고구려의 실지 회복의지는 꺾이고 말았다.

진흥왕이 달천을 통해 고구려 영토를 빼앗자 청천은 다른 모습으로 신라문화를 받아들인다. 도원리 절터에는 이 시기 가장 많은 신라계 와당이 만들어졌다. 왕도 서라벌에서 유행하는 연화문와당이 등장하는 것이다. 도원리에 자리 잡은 신라인들은 고구려 가람터에 절을 중수하고 불교문화를 심었다.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는 고 신라계 연화문 와당들이 조사되었다. 여덟 잎의 연화문 와당들은 연질로서 태토도 곱다. 흡사 백제 와당 닮고 있으나 경주 삼국시대 왕궁터 등에서 발견되는 막새를 닮고 있다. 속리산을 넘은 신라가 고구려 세력을 축출하고 이 절을 신라식으로 조영했음을 알려 준다. 절은 신라가 차지한 후 더욱 확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 신라계 와편 들이 많이 수습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500년 후 고려시대 들어 도원리 사지에서는 문예부흥의 기운이 싹튼다. 고구려 정신, 문화 복원에 대한 의지가 불타오른 것인가. 재미있게도 고구려 와당을 닮은 유물이 조사되었다. 와당의 끝은 뾰족하며 날카롭다. 색깔만 붉은색이라면 영락없는 고구려 와당이다.

도원리 절터 추정지에서 찾은 와편
도원리 절터 추정지에서 찾은 와편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