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지역 고구려 답사] 괴산 청천까지 미친 고구려 문화(1)
[남한지역 고구려 답사] 괴산 청천까지 미친 고구려 문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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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괴산군 청천강
괴산군 청천강

고구려군의 주 무대가 되었던 도원리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조 16년 기록을 보면 매우 흥미롭다. 장수왕(長壽王)에 의해 한강 왕도 위례성을 잃은 지 19년이 되는 해였다. 고구려는 금강 상류까지 남하하여 살수원 (薩水原)에서 신라군과 맞닥뜨리는 것이었다.

16년 7월에 고구려는 신라와 살수원에서 싸웠는데 신라가 이기지 못하고 견아성으로 물러서자 고구려가 이를 포위하므로 왕은 군사 3000명을 파견하여 이를 구원하여 포위를 풀 게 했다(十六年 七月 高句麗與新羅戰 薩水 之原 新羅不克 退保 犬牙城 高句麗圍之 王遣 三千救 解圍).

당시 신라와 백제는 매우 끈끈한 사이였다. 남하(南下)하는 고구려 세력을 저지하기 위한 동맹관계가 돈독했다. 고구려가 살수원에서 신라와 조우하기 1년 전 백제 동성왕은 신라 소지왕(炤智王)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혼사를 청했다. 신라왕은 흔쾌히 허락하고 아찬 비지의 딸을 시집보낸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신라 와 백제의 나제동맹이다.

고구려가 남하하여 신라와 조우한 ‘살수원’. 그 위치는 어디일까. 고구려군에게 패전하여 후퇴하면서 다급하게 백제왕에게 원병을 청한 견아성(犬牙城)은 지금의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견훤산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군은 한때 속리산 준령 가까운 곳까지 군사를 파견하여 신라를 위협한 셈이 된다.

역사학계가 ‘살수’를 충북 괴산군 청천으로 비정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언어학자들은 살수를 ‘살살 흐르는 내’에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 청천은 바로 살수의 한문 표기로 해석한다. 북한에 있는 청천강을 살수로 표기하는 것과 같다.

청천은 속리산에서 발원한 달천의 상류로서 인근 지역인 미원(米院)과 근거리에 위치해 있다. 청주시에서 청천을 가려면 바로 미원을 거쳐야 한다. 미원은 우리말로 ‘살원’이다. 이 이름이 한문을 차용하면서 ‘쌀 미(米)’자를 써 미원이 된 것이다. 살수원은 청천이 가까운 미원 평야일 가능성 이 높다. 당시 살수원에서 패전한 신라군이 보은을 통해 견아성으로 후퇴했다면 백제군의 지원이 가능해진다.

청천을 고구려식 이름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즉 청(靑)을 ‘말갈’의 청(淸)으로 보는 것이다. 청천은 ‘맑은 내’ 즉 고구려 이름인 말갈의 청이라는 것이다. 미원을 중심으로 청주·청안·청천 모두가 고구려식 지명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를 빌리면 청천은 고구려가 한창 막강 한 세력으로 한반도 이남을 깊숙이 공격할 5세기 후반 당시의 최남단이 되는 셈이다. 이들 세력은 국원성(충주)에 있던 고구려군으로, 달천을 통해 남하하여 청천에 이르렀을 것으로 상정된다. 그러나 신라의 완강한 저항으로 속리산 준령을 넘어 더 이상의 남하는 하지 못했다. 고구려군의 주 무대가 되었던 청천. 가장 아름다운 사적 명승지인 화양동(華陽洞)이 가까운 곳이다. 이 지역에 과연 어떤 고구려 유적이 남 아 있을까. 복사꽃 만발한 5월 초순, 역사의 현 장 청천으로 기행을 떠났다.

도원마을 표지
도원마을 표지

청천 도원리 무릉도원

도원리(桃源里)라고 했다. 행적구역 명칭은 괴산군 청천면 도원리다. 복사꽃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마을이다. 굽이쳐 흐르는 맑은 냇가를 끼고 자리 잡은 작은 마을, 알고 보니 내를 넘은 마을이 무릉리라고 한다. 두 마을을 합치면 바로 ‘무릉도원’이 된다. 조선 세종 때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꿈 얘기를 안견(安堅)이 그린 그림이 유명한 ‘몽유도원도’다. 일본 천리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실개천 산 깊이 흐른다곤 알았지만,

이리도 굽이 쳐

무릉도원까지 가는 줄 몰랐네.

그런데 봄만 오면 온 개천 꽃으로 가득

어디가 무릉도원인가 알 길이 없네.

(当时只记入山深,青溪几度到云林

春來遍是桃花水,不辨仙源何处寻)

자연에 대한 아름다운 시를 많이 지은 당 시인 왕유(王維, 699~759). 그가 17세 되던 해에 쓴 도원행(桃源行)이라는 시다. 왕유는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화가로서 여러 분야에서 이름을 떨쳤다. 시선(詩仙) 이백(李白), 시성(詩聖) 두보(杜甫)와 함께 3대 시인 중의 한명으로 꼽힌다. 그의 시에는 불교 영향이 많이 나타나있어 ‘시불(詩佛)’이라고도 불렸다. 그는 그림에도 뛰어나 남종문인화의 개조(開祖)로 여겨지고 있다. 송나라 소식(蘇軾)은 왕유를 가리켜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라는 유명한 평을 남겼다.

도원리 비석
도원리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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