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운동의 등불 ‘3.1 독립운동’ 한반도‘새 하늘 새 땅’ 희망 비추다

◆독립운동 중심에 선 범 종교인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3.1 독립운동은 1919년 3월 1일을 기해 한민족이 일제에 항거하며 일으킨 대표적인 독립운동으로 기미년(己未年)에 일어났다고 하여 기미독립만세운동이라고도 한다.

1910년 국권피탈 이래 지하에서 비밀리에 독립사상을 고취하며 독립운동의 기회만을 찾고 있던 일부 민족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원칙 발표, 재일유학생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급서 등이 계기가 되어 민족적 항일의식이 고조되자 이때가 한민족의 독립을 꾀할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거족적인 3.1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계획했다.

1918년 말부터 천도교 측은 권동진·오세창·최린·손병희 등을 주축으로 구체적인 추진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독립운동의 3대원칙으로 독립운동을 대중화·일원화·비폭력적으로 할 것을 결정하고, 그리스도교·불교·유림 등 각 교단을 총망라하는 동시에 대한제국시대의 유지들을 민족대표로 추대할 것에 합의했다.

 

▲ 1919년 3월 1일 정오부터 태화관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민족대표 29명은 오후 2시가 막 넘어서면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기 시작한다.

 

천도교 측에서는 손병희(孫秉熙)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최린(崔麟) 나인협(羅仁協) 임예환(林禮煥 이종일(李鍾一) 권병덕(權秉悳) 양한묵(梁漢默) 김완규(金完圭) 홍기조(洪基兆) 홍병기(洪秉箕) 나용환(羅龍煥) 박준승(朴準承) 이종훈(李鍾勳) 등 15명이 서명 날인했다.

그리스도교 측에서는 이승훈(李承薰) 양전백(梁甸伯) 오화영(吳華英) 박희도(朴熙道) 최성모(崔聖模) 이필주(李弼柱) 김병조(金秉祚) 김창준(金昌俊) 유여대(劉如大) 이명룡(李明龍) 박동완(朴東完) 정춘수(鄭春洙) 신석구(申錫九) 이갑성(李甲成) 길선주(吉善宙) 신홍식(申洪植) 등 16명이 서명했다. 또 불교 측에서는 한용운(韓龍雲)·백용성(白龍城)이 가담해 민족대표는 모두 33명으로 결성됐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기초해 2만 1000매를 인쇄했으며 거사일은 3월 1일로 결정했다(처음에는 고종의 인산일인 3월 3일로 정했다가 불경스럽다는 의견이 나왔고, 또 2일은 그리스도교인의 안식일이라 하여 1일로 결정됐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29명(지방에 있던 길선주·김병조·유여대·정춘수는 불참)은 서울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泰和館)에 모여 독립선언 시각인 오후 2시 독립을 선언하는 한용운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했다.

천도교·그리스도교·불교·학생 측 외에도 각 지방의 만세운동에는 농민이 가담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도시의 상인들은 연합해 철시(문을 닫고 영업을 안함)를 단행함으로써 일제에 항거했다. 또 노동자·승려·관리는 물론 어린이·거지·기생이 주동한 곳도 있었다.

국내에서의 3.1운동의 거센 물결은 국외에도 파급됐다. 서간도(西間島)와 북간도(北間島)를 비롯한 만주(滿洲) 지역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간도와 훈춘[琿春]등 둥산성[東三省]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미주지역에 흩어져 살던 한국 교포들도국내의 3.1 독립운동에 호응해서 모두 궐기했다. 프리모르스키 지역에서도 3월 17일 대한국민회의가 주체가 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규모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와 같은 민족적 궐기의 규모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집회횟수 1542회, 참가인원수 202만 3098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수 1만 5961명, 피검자수 4만6948명으로 추산된다.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편찬실장은 “일제의 식민정책에 억눌려 있던 우리민족이 3.1 운동으로 말미암아 독립에 대한신념과 자신감이 생겨 자주독립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며 3.1 운동의 의의를설명했다.

이러한 민족의 숭고한 자주독립정신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정부는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 공포하여 이날을 국경일로 정한다.

이날은 3부 요인을 비롯해서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모여 기념식을 거행하고, 조국광복을 위해 싸우다 순국한 선열의 유족 및 애국운동가들로 구성된 광복회 회원들은 별도로 파고다공원에 모여 그날의 뜻을 되새기는 의식을 거행한다.

◆독립선언서 한민족의 미래를 말하다
기미독립선언서는 1919년 3월 1일 3.1독립운동에 맞춰 민족대표 33인이 당시 일제강점기 하에 있던 조선의 독립을 국내외에 선언한 글로 3.1 독립선언서(三一獨立宣言書)라고도 불린다. 원래는 건의서 형식으로 작성될 예정이었으나, 건의서는 민족 자결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선언서를 따로 작성해야 한다는 최린의 주장으로 선언서 형식으로 작성됐다. 최남선이 초안을 작성했다.

국권을 되살리고 광복의 그날을 바라본 33인의 종교인은 기미독립선언문에 한반도의 미래뿐 아니라 인류 공존과 동북아·세계 평화를 부르짖었다. 기미독립선언문의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 사람이 자주권이 있는 국민인 것을 선언하노라. 이것을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 이것을 자손 만 대에 깨우쳐 겨레가 스스로 존재하는 마땅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노라… 이는 하늘의 명령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므로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것을 막고 누르지 못할 것이라… 아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누나! 힘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누나! 지나간 세기를 통하여 깎고 다듬어 키워온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새 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 위에 던지기 시작하누나! 새 봄이 온 누리에 찾아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누나… 전세계의 움직임이 우리를 밖으로 보호하나니 일에 손을 대면 곧 성공을 이룩하실 것이라. 다만 저 앞을, 빛을 따라 힘차게 전진할 따름이로다.’

강원도 인제군 원로회 방효정 회장은 “지금은 남북한으로 분단돼 있지만 종교인 33인이 기미독립선언문에 기록한 것처럼 앞으로 대한민국이 새 하늘 새 땅이 눈앞에 다가올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3.1정신구국운동범국민연합 김동환(천도교 전 교령) 총재는 “3.1운동은 구국운동으로 당시 2000만 동포들이 남녀노소 차별 없이 한마음으로 목숨을 걸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며 “우리는 현 시대에 여러 위기현상 앞에 놓여 있다. 종교·정당·사회단체 등의 분열과 분쟁은 국가의 장래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밝혔다. 덧붙여 그는 “3.1정신으로 전 국민이 하나 된다면 이 같은 나라의 위기를 슬기롭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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