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곳간] ‘인생은 시험의 연속’… 시험은 언제부터 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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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곳간 ⓒ천지일보 2020.2.10
문화곳간 ⓒ천지일보 2020.2.10

국내 최초의 학교는 ‘태학’
인재 뽑아 관리로 등용해

과거시험은 3년마다 치러
부정행위 시 두 차례 못 봐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인생은 시험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살이에서 시험이 오기도 하지만, 공부와 관련된 공부도 참 뗄 수 없다. 입학을 위한 시험은 물론, 승급을 위한 시험도 있고 개인의 능력 개발을 위한 시험도 있다.

◆교육기관과 시험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은 언제부터 시험을 치르게 된 것일까. 먼저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교육을 하는 기관이 등장해야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372년 설립됐는데, ‘태학’이라고 불렸다.

이곳은 실력이 좋다고 입학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귀족 자제들만 다닐 수 있었다. 학생들은 유교 경전을 익히거나 무예를 수련했는데, 이 가운데 시험을 쳐서 뛰어난 인재들을 뽑아 중앙 정부 관리로 등용했다.

고려시대는 불교가 사상과 생활 전반을 지배했다. 하지만 정치는 유교 이념에 따라 펼쳐졌다. 이때 과거제도가 있었는데 광종 임금 때인 958년에 시작됐다.

고려의 종합대학은 ‘국자감(國子監)’이었고 992년 수도인 개경이 설치됐다. 이곳에는 개경에 사는 귀족의 자제와 지방 세력 가문의 제자들이 다녔다. 교육은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 당시 중고등학교는 향교에서 담당했다.

향교는 국자감보다 늦게 설립됐는데 인종 임금 때(13세기)에 이뤄졌다. 향교에서 성적이 우수한 사람은 국자감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조선시대 학생들은 서당에서부터 차근차근 공부했다. 학동들은 ‘천자문’을통해 한문을 배웠다. 그리고 ‘동몽선습’ ‘사략’ ‘명심보감’ 등을 공부하며 글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성균관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자격시험인 문과(대과)에 통과해야 했다. 시험에 합격해야만 최종 목표인 관리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런데 성균관에는 아무나 입학할 수는 없었다. 과거시험 중 하나인 ‘소과’가 3년마다 치러졌는데 이 시험에 합격해야 생원이나 진사가 되어야만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다. 당시 관료가 되는 방법은 과거와 음서가 있었다. 음서는 가문의 배경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치러졌다. 반면 과거는 출신 상관없이 자신의 능력대로 시험 당락이 결정됐다.

◆즐비했던 부정행위

그렇다면 시험과 관련해 부정행위는없었을까. 역시나 과거에도 부정행위는 즐비했다. 대리시험을 치거나 시험장에 드나드는 행위 등이 일어났으며, 국가에서는 이를 막고자 하는 방법이 행해졌다. 먼저 응시생은 시험장에 시험에 필요한 먹이나 붓, 벼루만 가지고 들어가야 했다. 양반집 자제들의 경우 수발드는 사람들과 함께 다녔는데, 혼자 시험장에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응시생들 간에 거리를 벌려서 앉도록 했다.

만약 시험과 관련해 규정을 어기거나 부정행위를 하다 걸릴 경우, 응시 자격을 두 차례 박탈당했다. 만약 타인이 시험지를 베껴 쓸 경우, 혹은 남이 시험지를 마치 자신이 푼 것처럼 해서 제출할 때도 곤장을 맞아야만 했다.

조선 숙종 때, 과거시험 부정행위가발생했다. 세 차례 발생한 ‘과옥(科獄)’이었다. 이중 ‘기묘과옥(1699년)’은 과거 시험에 일부 관원이 청탁을 받고 수험생 답안지 내용을 고쳐주거나 시험주제를 미리 유출해 부정합격을 시켰다. 이 사건과 관련해 무려 50명의 응시생이 처벌받아,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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