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충주 고구려비
충주 고구려비

충주 고구려비의 발견

1979년 봄 기적적으로 고구려비가 찾아졌다. 비가 찾아진 곳은 바로 탑평리 인근에 있는 입석리 동네 입구에서였다. 입석(立石)은 비가 세워졌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이 비의 발견과 고증에도 역시 고(故) 정영호 박사가 나섰다. 남쪽으로는 탑평리, 북쪽은 장미산성, 서쪽으로는 건흥면 광배가 발견된 노은면과 인접해 있으며 보련산이 내려다보고 있다.

충주 고구려비는 만주지안 통구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금석문이다. 높이 203㎝, 폭 55㎝, 두께 33㎝이며, 커다란 자연석을 다듬어 그대로 비면(碑面)으로 삼고 있다. 4면에 모두 예서체로 글을 새겼지만 뒷면과 우측면은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마모됐다. 앞면과 좌측면 일부 내용만 확인됐다. 자경(字徑)은 3~5㎝로 앞면에 23자씩 10줄, 좌측면에 23자씩 7줄이 있으며, 우측면에는 6줄, 뒷면에 9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에 고구려의 왕이라는 의미의 ‘高麗太王(고려태왕)’이나 ‘使者(사자)’와 같은 고구려 관직명과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보이는 ‘古牟婁城(고모루성)’등 고구려 영역의 성 지명들로 나타난다. 거기다 ‘신라토내(新羅土內)’ 같은 글자들도 나타나고 있어 고구려비라고 평가하는 데는 학계에서 재론의 여지가 없다. 판독된 비문은 다음과 같다.

정면

五月中高麗太王 相王公□新羅寐錦世世爲願 如兄如弟

上下相和守天東來之寐錦忌太子共前部大使者 多亐桓

奴主簿道德□□□安□□去□□到至跪營□太 子共□

尙□上共看節賜太翟□食□□賜寐錦之衣服 建立處

用者賜之隨者節□□奴客人□敎諸位賜上下衣 服敎東

夷寐錦遝還來節敎賜寐錦土內諸衆人□□□□ 王國土

大位諸位上下衣服兼受敎跪營之十二月廿三日 甲寅東

夷寐錦上下至于伐城敎來前部大使者多亐桓奴 主簿□

□□□境□募人三百新羅土內幢主下部拔位使 者補奴

□□奴□□□□盖盧共□募人新羅土內衆人拜 動□□

왼쪽

□□□中□□□□城不□□村舍□□□□□□ □沙□

□□□□□□□□班功□□□□□□□□節人 □□□

□□□□□□辛酉年□□□十□□□□□太王 國土□

□□□□□□□□□□□□□□□□□□□□ □□□

□□□□□□□□□上有□□酉□□□□東夷 寐錦土

□□□□□□方□桓□沙□斯色□□古加共 軍至于

伐城□□□古牟婁城守事下部大兄耶□

…中… 城不… 村舍… 沙

…班功… 節人…

辛酉年… 十… 太王國土…

오른쪽

□公□□□□衆殘□□□□□□□□□不□□ 使□□

□壬子□□伐□□□□□□□□□□□□□□ □□□

“5월에 고려태왕(高麗太王)의 상왕공(相王公)과… 신라 매금(寐錦)은 세세(世世)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 서로 수천(守天)하기 위해 동으로(왔다). 매금(寐錦) 기(忌) 태자(太子) 공(共) 전부(前部) 대사자(大使者) 다울환노(多亐桓奴) 주부(主簿) 도덕(道德) 등이… 로 가서 궤영(跪營)에 이르렀다. 태자(太子) 공(共)… 상(尙)…상공간(上共看) 명령하여 태적추(太翟鄒)를 내리고… 매금(寐錦)의 의복 (衣服)을 내리고 건립처(建立處) 용자사지(用 者賜之) 수자(隨者)…. 노객인(奴客人)… 제위(諸位)에게 교(敎)를 내리고 여러 사람에게 의복을 주는 교(敎)를 내렸다. 동이(東夷) 매금(寐錦)이 늦게 돌아와 매금(寐錦) 토내(土內)의 제중인(諸衆人)에게 절교사(節敎賜)를 내렸다. (태자 공(共)이) 고구려 국토 내의 대위(大位) 제위(諸位) 상하에게 의복과 수교(受敎)를 궤영에서 내렸다. 12월 23일 갑인에 동이매금(東夷寐錦)의 상하가 우벌성(于伐城)에 와서 교(敎)를 내렸다. 전부 대사자(大使者)다 울환노(多亐桓奴)와 주부(主簿) 도덕(道德)이 국경 근처에서 300명을 모았다. 신라토내 당주 하부(下部) 발위사자(拔位使者) 보노(補奴)…와 개로(盖盧)가 함께 신라 영토 내의 여러 사람을 모아서 움직였다.”

이 비를 고구려비로 단정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비문에 보이는 ‘고려태왕(高麗太 王)’이나 ‘사자(使者)’와 같은 고구려 관직명이다. 또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보이는 ‘고모루 성(古牟婁城)’ 등 고구려 영역의 지명 등도 있다. 여기에 ‘신라토내(新羅土內)’ 같은 고구려 입장에서 신라를 부르던 글자들도 드러나고 있어서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비의 건립 시기는 장수왕(재위 412~491) 과 자명왕(재위 492~519) 대로 추정된다. 장수왕 시대로 보는 근거는 비문 속의 간지와 날짜, 당시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따른 영역의 확장,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 등을 고려해서다. 문자명왕 시대로 보는 근거는 비석 앞면 첫째 줄의 ‘고려태왕조왕령(高麗太王祖王令)’이라는 문구 때문이다.

비의 건립과 목적도 학자들 간에 이론이 팽배하다. 고구려가 충주지역을 장악한 후 기념으로 세운 척경비 또는 정계비라는 주장이 있다. 한강 백제 위례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참수하고 남하하여 남한강을 장악한 장수왕의 공적비로 보기도 한다.

장미산성
장미산성

고구려가 보축한 ‘장미산성’

‘장미산성(薔薇山城)’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장미꽃을 상상하면서 왜 이런 이름을 갖게 됐는가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적 제400호로 지정된 이 성은 장미산의 능선과 계곡을 감싸는 포곡식 산성으로 전장 2040m에 달한다. 남한강 길목을 지키며 유사시 입석마을과 탑 평리 일대에 거주했던 주민들을 보호했던 성곽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14권에 보면 ‘하 천 서쪽 28리에 옛 석성이 있다’는 기록과 <대동지지>에 ‘장미산에 옛 성의 터가 남아있다’ 는 기록이 있다.

1992년 조사결과 성 안에서 백제의 것으로 보이는 토기편과 기와 조각이 찾아졌다. 토기들은 한성백제 시기의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면 이 성의 초축(初築)도 백제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상정된다. 그리고 고구려, 신라의 와편 토기조각이 보여 백제·고구려·신라가 차례로 이 성을 경영하였음을 알려준다. 고구려는 한강변에 대한 지배 시기가 짧아 대개 백제가 구축한 자리에 석축을 쌓는 것이 상례였다. 경기도 포천시 반월성, 양구 비봉산성(要隱忽次. 혹은 要隱忽此), 임진강 고모루성에서 보이는 양식이 그렇다. 할석과 흙을 이용하여 다져 쌓은 판축성 위에 견고한 석축을 보강한 것이다.

장미산성 외관에 나타나는 견고한 석축은 그야말로 장관이며 이는 고구려 지배 때 축조한 것이다. 지금까지 한반도 일대에서 조사된 고구려 보축성 가운데 가장 완벽하며 잘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성에도 남매 축성설화가 전해내려 온다. 옛날 노은면 가마골 마을에 장미라는 남동생과 보련이라는 누이가 살았다. 그런데 둘 다 장수의 기질을 타고 태어났다. 한 집안에서 장수가 둘이 출생하게 되면, 한 명은 죽어야만 하는 비운을 안고 있었다. 그리하여 두 남매는 생사를 건 시합을 하기로 했다. 장미는 장미산에 성을 쌓고, 보련은 보련산에 성을 쌓는 시합이었다.

시합을 하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보니 보련이가 앞서고 있었다. 장미를 살리고 싶은 어머니가 떡을 해가지고 가서 보련에게 먹고 하라고 하였다. 보련이 떡을 한 접시 먹고 마지막 돌을 들고 가려는데 장미 쪽에서 축성이 끝났다고 하였다. 보련이 진 것은 떡 한 접시를 먹은 시간 때문이라고 한다. 내기에 진 보련이는 스스로 연못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충북도 내에는 이런 남매축성설화가 많이 내려온다. 청주시 구녀산성(九女山城)에는 딸 아홉 명이 등장하여 아들과 축성 내기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결국은 딸들이 모두 죽는 것으로 설화가 엮어져 남아선호사상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장미’의 ‘장(薔)’은 길다라는 ‘長’의 다른 표기이며 ‘미’는 ‘퇴미’의 약어로 성을 뜻하는 말이다. 길고 큰 성이라는 뜻에 남매축성 설화가 가탁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여러 차례의 조사결과 성벽과 치성, 배수로, 공격용 돌을 보관 한 성곽시설 등이 확인됐다. 안쪽으로 양쪽 끝을 뾰족하게 다듬은 형태의 북돌을 넣고 빈틈에는 작은 돌들을 채워 올리다가 지형의 안과 밖이 수평이 되는 지점부터 내벽과 외벽을 동시에 쌓아올리면서 그 사이에는 다시 북돌을 가지런히 채워 넣었다.

글마루 취재반은 장미산성을 조사했다. 산성에 있는 봉학사까지 차량을 통해 올라갈 수 있어 매우 용이했다. 한눈에 남한강과 보련산 입석리가 들어온다. 발끝에 닿는 것이 모두 와편이다. 극소수의 붉은색 고구려 와편 외에 연질 백제 와편과 토기편도 수습할 수 있었다. 여기서도 삼국의 치열한 쟁패의 역사를 읽을 수 있었다. 취재반은 여기서 치성(雉城)의 흔적을 찾았다. 공격해 오는 적들을 효율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만든 치성은 고구려성의 독특한 방어시설이다.

고구려가 보축한 장미산성의 모습
고구려가 보축한 장미산성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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