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역대 항주의 지방관들 가운데 고대의 이필(李泌), 백거이(白居易), 소동파(蘇東波), 양맹영(楊孟瑛), 완원(阮元)과 함께 근대의 임계(林啓)도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다. 임계는 복건성의 교육자 집안에서 자라 청의 광서(光緖)2년(1876)에 진사가 됐다. 청일전쟁에서 패한 후 서태후가 해군의 경비를 전용하여 이화원을 짓자 반대상소를 올렸다가 항주지부로 좌천됐다.

항주는 절강의 성도로 관청이 많았기 때문에 부조리도 많이 발생했다. 신임지부임계는 가혹한 잡세를 일체 폐지하는 금령을 비석에 새겨 발표했다. 절대 변경하지 않겠다는 표시였다. 고소장을 낸 백성을 직접 접견하여 민정을 살피기도 했다. 항주에는 외국인이 많았다. 그들은 걸핏하면 부당하게 요구했다. 임계는 엄중히 거절했다. 항주사람들은 그가 재임한 5년 동안 누구나 이익을 얻으며 화목하게 살았다고 회고한다.

임계는 학교를 세우고, 산업을 장려해 독실한 사회 풍조를 조성했다. 강유위(康有爲)와 양계초(梁啓超)가 변법유신을 주창하며 각지에서 학교를 세워 신지식이 전파했고 항주에 3개의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절강대학의 전신인 구시서원(求是書院), 절강제1중학이 된 양정서숙(養正書塾), 잠상학교(蠶桑學校)이다. 이 3개의 학교는 20세기 전반까지 절강의 교육과 산업의 중추였다.

1897년 1월에 설립한 구시서원의 자리에는 절강도서관이 있다. 구시서원의 설립취지는 실학의 추구에 따른 과학기술의 연마였다. 미국인이 영어와 화학 등을 가르쳤고, 혁신파 학자들이 경사(經史)와 시문(詩文)을 가르쳤다.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장병린은 나중에 입학했다. 임계는 실무 책임자를 겸하여 친히 서원의 규정과 과목을 제정했다. 팔고문(八股文)과 붓으로 필기하는 것을 폐지하고 외국서적을 소개했다.

인재양성을 중시한 임계는 일본이 유신을 일으킨 지 불과 20년도 안되어서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을 거울로 삼았다. 한 사람을 서양에 파견하는 비용으로 10명을 일본으로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해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했다. 창립 2년차에 하섭후(何燮侯) 등 4명이 일본으로 유학했다. 중국인의 일본유학 제1호였다. 구지서원은 1902년, 절강대학당으로 바뀌었다. 양정서숙은 1899년 원통사(圓通寺)가 있던 대방백(大方伯)에 설립됐다. 부근에 영국인이 운영하던 병원 광제원(廣濟院)이 있었다. 사찰을 탐낸 병원장이 위협과 유혹을 가했지만, 임계는 국가자산이라고 거절했다. 양정서숙은 1901년 11월에 항주부중학당으로 바뀌었다. 임계의 영향으로 절강제일사립중학인 안정학당(安定學堂)과 중문중학인 숭문의숙(崇文義塾)이 설립됐다.

임계는 고산(孤山)에 은거하며 매화를 아내로, 학을 아들로 삼고 지냈던 임화정을 매우 좋아했다. 고산에는 이미 임화정이 심은 매화나무가 거의 없어졌다. 임계가 심은 100그루의 매화나무는 지금도 남아 있다. 1900년 봄, 그는 친구들과 함께 고산에서 매화를 감상했다.

위아명산류일석(爲我名山留一席) 간인환해도운범(看人宦海渡雲帆)

나를 위해 명산에 남은 한 자리, 구름 같은 돛단배 타고 건너가고 싶다네.

그가 죽은 후, 항주 사람들은 고산에 묻고 임사(林祠)를 세웠다. 지나가던 많은 명사들이 사당의 기둥에 이런 글을 남겨 놓았다.

교육과 양잠으로 세 번이나 태수를 도와 어질게도 힘을 다하다가 매화와 학을 따라가서 향불이 되어 고산에서 살고 있네.

시대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 위대한 스승들은 교육에 전념했다. 항주가 고도로서의 가치를 넘어 명성을 유지하는 것은 교육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