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금석에 담은 천하제일의 대국

탑평리에 대 가람 힘찬 붉은 연화문와당 남겨

국보 제6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국보 제6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탑평리의 힘찬 고구려 와당

지난 1978년 수마가 충주시를 할퀴고 자나갔다. 남한강 유역의 수재가 심각했다. 중앙탑면 탑평리 국보 칠층석탑 일대의 경작지가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수해복구를 하는 과정에서 불도저 등 중장비가 절터 일대를 정비하면서 지하에 묻혀있던 많은 기와 조각이 드러났다. 전국 유적 조사에 나섰던 단국대 학술조사단은 불도저가 지나간 자리에 뒹굴고 있는 귀한 와당들을 수습할 수 있었다. 조사단장 정영호 교수(작고)는 와편 가운데 매우 주목되는 것을 찾아 고심에 빠졌다.

경주 인근에서 조사되는 고(古) 신라와당을 닮기도 했고 은사이신 동국대학교 황수영 박사 가 소장하고 있던 백제와당(?)과도 동일했다. 황 박사 소장의 와당은 충남대학교 박물관에 서 펴낸 <백제와전도보(百濟瓦塼圖譜)>에 실려 있었다. 출토지는 분명치 않고 공주 탄천 일 대에서 수습된 것이라고 전해져 온 와당이었다. 정 박사가 수습한 와당은 붉은 색이었다. 연판은 6개로 끝은 반전되어 흡사 해바라기 모양이었다. 이 와당을 만든 장인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이었을까. 정 박사는 며칠을 생각하다 이 와당을 고구려계라고 단정 지었다. 그리고 언론에 한반도에서 처음 찾아진 고구려 와당 이라고 공표했다. 가장 확신을 가진 것은 충주가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 터였고 절터에서 많은 양의 붉은 색 와편이 수습됐기 때문이다.

이 발표가 보도되자 학계에서는 반론이 제기 됐다. 백제 것이라는 학자들도 있었고 고(古) 신라 와당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와당 국적 논쟁은 한참동안 지속되다 잠잠해졌다. 그런데 이로부터 몇 년후 탑평리 인근에 있는 가금면 입석리에서 고구려비가 찾아졌다. 가금면 일 대가 고구려 세력의 중요 거점이었음을 알려주는 증거물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수십 년 후 필자는 서울의 한 수장가 집에서 중국 지안에서 수습됐다는 붉은 색의 고구려 와당 한 점을 조사할 수 있었다. 모양과 색깔 모두 탑평리에서 수습된 와당과 닮아 있었다. 와당의 크기는 비록 작았으나 지안(集安) 고구려 왕도에 사용되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이 와당을 조사한 후 필자는 당시 탑평리 유물을 고구려계라고 단정한 고(故) 정 박사의 혜안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충주를 지배했던 시기는 고구려비에 기록된 5세기 말 장수왕~문자왕 대이고 그 중심세력은 지안에서 내려온 집단이었던 것이다. 충주 중앙탑면 탑평리를 중심으로 한 일대야말로 고구려 세력이 둥지를 틀고 국원(國原)으로 삼은 고대사 기록을 확실히 뒷받침하는 유적의 보고다. 이번에는 삼국 쟁패의 역사와 태양의 후예로 자처했던 고구려 전사의 혼이 어린 남한강 탑평리 일대를 여행해 본다.

연화문수막새(삼국시대)
연화문수막새(삼국시대)

충주 노은면에서 찾아진 ‘건흥’명 광배

일제강점기인 1915년 충주 노은에서 발견된 건흥명(建興銘) 광배는 불상의 뒷면에 장착하던 유물이었다. 불상은 없어지고 광배만 남은 것이었다. 이 작은 유물이 왜 주목을 받은 것일까. 바로 고구려시기로 상정되는 ‘건흥’ 연호가 나오기 때문이다. 광배 뒷면에 새겨진 글씨 는 다음과 같다.

建興五年歲在丙辰 佛弟子淸信女 上部兒庵造 釋迦文像願生生世世値佛聞法一切衆生同此願

‘건흥 오년 병진년 불제자 청신녀가 상부 아암 에서 석가상을 조성하여 일체 중생들에게 세세토록 불법이 미치기를 염원한다’는 내용이다. 건흥은 476(장수왕 64)년설, 536(안원왕 6) 년설, 596(영양왕 7)년설이 있으며 상부(上部)란 고구려 오부 중 하나였다.

필자는 이 광배가 발견되었다는 노은면 일대의 절터를 찾아다닌 적도 있는데 가장 높다는 표고 736의 보련산성(寶蓮山城)까지 올라가 보기도 했다. 그러나 수풀이 우거지고 사람들 이 찾지 않은 탓에 와편도 줍지 못했다. 보련산 성은 산세가 험준하여 오르기도 어렵지만 고구려 유적일 가능성이 있어 향후 조사가 필요한 곳이다. 이 광배의 존재는 일제강점기부터 충주의 고구려 유적 출현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탑평리 고구려 절터의 확인이었다.

7층 석탑(중앙탑) 인근에서 발견한 삼국시대 와편들
7층 석탑(중앙탑) 인근에서 발견한 삼국시대 와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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