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한 말 

문정희(1947 ~  )

추위와 어둠을 조금도 건드리지 않고
눈은 내려와 스스로 환해진다
결빙의 여린 뿌리들에게
촉촉이 몸을 풀어 준다
 
하늘의 젖꼭지를 물고
별도 사람도 함께 따라 도는
겨울 밤
   
호호 손을 불며
깊은 상처를 깎아  
밤을 새워 시를 쓰는 시인이 있다면
스스로 환해지는 시인이 있다면
 
시 고료로
소복한 눈 한 말을 드려도 좋으리.

[시평]

추운 겨울, 때때로 푸근히 내리는 눈이 있으므로, 우리의 춥고 또 지루한 겨울은 풍성해 질 수가 있다. 올 겨울은 난동(暖冬)이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풍성한 눈을 만나지를 못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겨울이 겨울답지 못하다고 말들을 한다. 눈은 그만큼이나 겨울을 풍성하게 하며, 동시에 그 겨울을 더욱 겨울답게 하는 무엇이기도 하다.

그래서 눈은, 펑펑 내리는 함박눈은 마치 춥고 긴 겨울의 특별한 선물 같기도 하다. 추위와 어둠을 조금도 건드리지 않고, 스스로 세상을 환하게 만드는 눈. 이러한 눈은 어쩌면 차가운 별들만이 외롭게 지켜야 하는 겨울밤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축복인지도 모른다.

추운 겨울밤, 호호 손 불어가며, 내면 깊이 자리하고 있는 자신의 상처, 스스로 아프게 깎아가며 시를 쓰는 시인들. 시상(詩想)에 깊이 잠겨 고뇌하다가 문득 내어다 본 창밖, 밤하늘을 가득 메우며 펑펑 함박눈이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이렇듯 만난 겨울밤의 눈, 이 눈이 바로 이 밤을 견디며 시를 쓰는 시인의 진정한 고료가 아니겠는가. 소복한 눈 한 말, 고료로 받으며 시를 쓰는 시인, 견뎌야 하는 겨울밤이 아무리 춥고 길어도 결코 외롭지 않으리라.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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