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사(사당)에 마련된 김좌진 장군 분향대의 모습. 향연과 함께 액자 속 백야 김좌진 장군의 모습이 보인다. (제공: 홍성군) ⓒ천지일보 2020.1.31
백야사(사당)에 마련된 김좌진 장군 분향대의 모습. 향연과 함께 액자 속 백야 김좌진 장군의 모습이 보인다. (제공: 홍성군) ⓒ천지일보 2020.1.31

서울서 차로 2시간 거리

충청남도 기념물 제76호

 

김좌진 장군 순국 90주기

계몽운동·항일투쟁에 힘써

 

승리로 이끈 청산리대첩

10월 25일 추모제 열어

[천지일보=정다준 기자] 임진왜란 때 조선을 승리로 이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일제강점기 때에는 독립군을 승리로 이끈 백야 김좌진 장군이 있다. 올해는 김좌진 장군이 순국한 지 90주기다. 특히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청산리대첩 100주년이 되는 해로 그 의미가 더해진다. 한해를 시작하는 이때.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터에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독립투사의 얼을 느껴보자.

기자는 백야 김좌진 장군의 순국 90주기를 사흘 앞둔 지난 21일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 위치한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터를 찾았다. 이곳은 서울역에서 차로 2시간 정도 달리면 갈 수 있다.

백야 김좌진 장군 집안 대대로 자라온 생가의 모습이다. 본래 터만 남았던 이곳은 1991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통해 복원됐다. (제공: 홍성군) ⓒ천지일보 2020.1.31
백야 김좌진 장군 집안 대대로 자라온 생가의 모습이다. 본래 터만 남았던 이곳은 1991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통해 복원됐다. (제공: 홍성군) ⓒ천지일보 2020.1.31

◆대대손손 살아온 곳… 터만 남아 복원

김좌진 장군의 생가터는 김좌진 장군 집안 대대로 살아온 곳으로 1991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해 본래 터만 남아있던 곳을 복원한 곳이다. 생가터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됐으며 가옥은 안채, 사랑채, 광이 따로 있고 앞면 8칸 옆면 3칸의 기와집으로 서쪽을 향하고 있다.

방 곳곳에는 액자에 김좌진 장군이 나온 사진과 신문기사, 자료 등이 걸려있었고 황토로 지었는지 황토 냄새를 맡으니 시골 느낌이 물씬 풍겼다. 마당 한쪽에는 물이 담긴 우물과 장독대들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밖에는 마구간과 화장실이 있는데 마구간 안에 있는 모형 말은 실제 말로 착각할 정도로 생동감 있어 보였다.

이날은 평일이라 비교적 한산했다. 이곳을 찾은 관람객은 단체 관람하러온 학생들과 늙은 노부부만을 찾아볼 수 있었다. 생가터에는 백야기념관과 백야사, 백야공원 등이 함께 위치했다.

[천지일보=정다준 기자] 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애와 업적을 전시한 백야기념관의 모습이다. 기념관에는 독립운동내용과 무장독립전쟁 준비과정, 청산리대첩 전투과정,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술 및 무기편성 등이 전시돼 있다. ⓒ천지일보 2020.1.31
[천지일보=정다준 기자] 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애와 업적을 전시한 백야기념관의 모습이다. 기념관에는 독립운동내용과 무장독립전쟁 준비과정, 청산리대첩 전투과정,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술 및 무기편성 등이 전시돼 있다. ⓒ천지일보 2020.1.31

◆김좌진 업적 전시된 백야기념관

생가터를 둘러본 후 바로 옆 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애와 업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백야기념관으로 향했다. 기념관 입구를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백야 김좌진 장군의 흉상이다. 그의 흉상에선 비장함과 조국을 향한 걱정스런 마음이 전해졌다.

이어 오른편에는 김좌진 장군의 시가 있다. 조국을 잃은 아픔을 담은 시로,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뜻하는 ‘단장지통’이라는 시다.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
칼끝에 찬 서리가 고국생각을 돋구누나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말인가
단장의 아픈 마음 쓰러버릴 길 없구나

짧은 시지만 빼앗긴 조국을 생각하는 김좌진 장군의 한스런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백야기념관은 2개의 전시실로 나뉘는데 제1전시실에는 김좌진 장군의 탄생부터 만주 망명까지의 과정을 전시한 곳이다. 장군의 집안, 호명학교 설립을 통한 애국계몽운동, 경술국치 이후 독립운동내용과 무장독립전쟁 준비과정을 전시하고 있다.

제2전시실에는 김좌진 장군 최고의 업적인 청산리대첩에 대한 내용을 전시한 곳으로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간의 전투과정,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술 및 무기편성 등이 전시돼 있다.

백야기념관 내 전시관 김좌진 장군의 흉상의 모습. 그의 표정에서 비장함과 조국을 향한 걱정스런 마음이 전해진다. (제공: 홍성군) ⓒ천지일보 2020.1.31
백야기념관 내 전시관 김좌진 장군의 흉상의 모습. 그의 표정에서 비장함과 조국을 향한 걱정스런 마음이 전해진다. (제공: 홍성군) ⓒ천지일보 2020.1.31

◆김좌진 장군의 생애와 업적

백야 김좌진 장군은 안동김씨 수북공파 10세손으로 문안집안이자 홍성 갈산지역 부호출신이다. 장군은 대한제국 말기였던 1889년 12월 16일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으며 유년시절부터 계몽의식을 갖게 돼 민족계몽운동과 항일독립운동에 힘썼다.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3세 때 형 김경진이 15촌 아저씨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 됐다. 1904년 15세가 됐을 때 집안 대대로 부리던 노비 50명의 노비문서를 불사른 뒤 전답을 나눠줬으며, 1905년에는 서울로 올라와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했다.

1907년 호명학교를 세워 신학문을 교육했으며 1911년 북간도에 독립군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부호들을 상대로 군자금 모금에 나섰다가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출소 후 “사나이가 실수하면 용납하기 어렵고 지사가 살려고 하면 다시 때를 기다려야 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1916년 대한광복회에 가담해 항일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1919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대한정의단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칭, 소속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돼 독립군 편성에 주력했다.

백야기념관 내부의 모습. 광복군 병사들의 조국독립과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맹세들이 쓰여 있는 태극기(1945년 중국전선). (제공: 홍성군) ⓒ천지일보 2020.1.31
백야기념관 내부의 모습. 광복군 병사들의 조국독립과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맹세들이 쓰여 있는 태극기(1945년 중국전선). (제공: 홍성군) ⓒ천지일보 2020.1.31

1920년 10월에는 같은 해 6월 봉오동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이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만주로 출병하자 소속 독립군을 백두산으로 이동시키던 중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만나 전투가 시작됐다. 10월 21일 청산리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엿새간 이어진 청산리대첩에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이 합동작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 3000여명을 살상하는 대승을 거뒀다. 독립운동 역사상 최고의 업적이다.

이후 1925년 신민부(新民府)를 창설해 군사부위원장 및 총사령관이 됐으며, 성동사관학교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사관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29년 7월 신민부의 후신인 한국총연합회의 주석으로 선임됐다. 대한정의단 군사책임,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신민부 총사령관, 한국총연합회 주석 등으로 활동하며 애국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을 이어왔다. 그는 안타깝게도 1930년 1월 공산당 청년당원에게 암살당했다. 당시 김좌진 장군은 “할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라며 순국 직전까지 조국을 걱정했다고 한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받았다. 이 같은 김좌진 장군에 대한 내용을 백야기념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백야공원에 자리 잡은 김좌진 장군의 유년시절부터 독립군 활동을 묘사한 동상들. (제공: 홍성군) ⓒ천지일보 2020.1.31
백야공원에 자리 잡은 김좌진 장군의 유년시절부터 독립군 활동을 묘사한 동상들. (제공: 홍성군) ⓒ천지일보 2020.1.31

◆독립운동 정신 기리는 백야사·백야공원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터 뒷산에는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백야사와 백야공원이 조성돼 있다. 기념관 뒤 계단을 조금 오르면 백야공원이 나오는 데 지대가 높아서 주변을 훤히 볼 수 있다. 백야공원에는 장군의 유년시절부터 독립군 활동을 묘사한 동상과 항일 독립운동 업적을 기리기 위한 ‘김좌진장군비’가 세워져 있다.

백야사는 한식목조와가로 총 24.37평의 규모이며 재실과 내삼문, 외삼문으로 구성된 사당이다. 재실은 김좌진 장군이 와룡천(臥龍川)에서 무예를 연마했다는 의미로 와룡재(臥龍齋)라고 지었고, 외삼문과 내삼문은 ‘화룡현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해 각각 화룡문(和龍門), 청산문(靑山門)이라고 지어졌다. 백야사에는 김좌진 장군 사진과 함께 분향대가 마련돼 분향할 수도 있었다. 이날은 김좌진 장군의 순국 90주기를 사흘 앞두고 있어 내삼문과 외삼문에는 미리 방문한 이들이 두고 간 근조화환이 놓여 있기도 했다. 매년 10월 25일 청산리대첩 전승기념일에 맞춰 이곳에서 추모제가 열린다.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터의 관람료는 무료이며 관람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해설안내도 받을 수 있다.

한편 백야 김좌진 장군이 태어난 충남 홍성군은 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맞아 올해를 ‘백야 김좌진 장군 나라 사랑 선양의 해’로 선포하고 다양한 기념사업을 펼치고 있다.

상공에서 찍은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터의 모습. (제공: 홍성군) ⓒ천지일보 2020.1.31
상공에서 찍은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터의 모습. (제공: 홍성군) ⓒ천지일보 202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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