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9월 12일 조선일보에 실린 신사참배 모습.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 평양신사에서 목회자와 교인들이 신사참배를 하고 있다. (출처: 한국기독교흑역사 캡처) ⓒ천지일보DB
1938년 9월 12일 조선일보에 실린 신사참배 모습.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 평양신사에서 목회자와 교인들이 신사참배를 하고 있다. (출처: 한국기독교흑역사 캡처) ⓒ천지일보DB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1989년 12월 28일 서울 강남 침례교회에서 36개 교단과 6개 단체가 모여 창립했다. 한때 교세로 한국교회를 대표하며 위력을 발휘했지만 부패함으로 교계로부터 외면을 당한 한기총. 지난달 한기총은 쓸쓸하게 서른 살의 생일을 맞았다. 새로운 한 세대를 시작할 수장을 뽑는 대표회장 선거에도 ‘하나님을 죽인다’고 종교적인 망언을 내뱉은 이가 단독 후보로 등장했을 정도다. 교계에서는 한기총은 가망이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교회는 한기총을 외면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기총의 역사적인 핏줄에는 한국교회의 피가 흐른다. 본지는 한기총이 지나온 30년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고 오늘날 한국교회에 던져주는 의미를 찾아본다. 

한기총 주축 장로교, 일제 강점기 日천황신 참배 주도
“신사참배 결과로 남북 갈라지게 됐다” 학계 평가도

한국교회, 목숨부지 위해 교회 종까지 떼어다가 바쳐
신사참배 결의한 교단들, 친일 행적 해방 전까지 지속
“신사참배에 자유로울 한국교회와 성도 아무도 없어”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한기총의 역사를 살펴보면 한기총 주축인 보수 장로교는 일제강점기 때 국권을 침탈한 일본 천황신에게 절하는 ‘신사참배(神社參拜)’를 주도했다. 신사참배는 한국교회사에서 씻을 수 없는 수치스런 사건으로, 우상에게 굴복한 치욕적인 흑역사로 기억된다.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한 한국교회

“우리는,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본뜻을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한다. 그러므로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하여 열심히 행하고 나아가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아래 후방의 황국신민으로서 열과 성을 다하기로 결의한다.”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에서 총회장 홍택기 목사의 발언은 한국장로교사에 부끄러운 역사의 한 줄이 됐다. 신사참배를 찬성한다는 내용이 담긴 ‘긴급 동의안’은 이날 사전에 약속된 대로 막힘없이 통과됐다.

“가(可) 하면 예 하시오”라는 홍 목사의 물음에 소수의 몇몇 사람만 “예”라고 답했다. 다수의 침묵에 경찰들이 일어나 우협적인 태도를 보이자, 당황한 홍 목사는 부(否)는 묻지 않고 “안이 통과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안됩니다. 불법이요” 외치는 사람들은 입이 틀어 막힌 채 퇴장 당했고 ‘딱딱딱…’ 가결을 알리는 둔탁한 소리를 끝으로 신사참배는 결의됐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였지만, 이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성경의 십계명 중 제1·2계명인 기독교 핵심 교리를 저버린 것이었다.

게다가 일제 침략전쟁에 필요한 ‘조선장로호’라는 전투기와 기관총 대금을 교회 헌금으로 헌납하고 교회 종을 떼어다가 바쳤다. 심지어는 교회를 통폐합한 후 교회 건물과 부지까지 일제에 상납했다. 교회는 일제를 찬양하는 기미가요(일본 국가)를 불렀고, 예배 시간에도 일어나 천황이 사는 동쪽을 향해 절하는 ‘동방요배’를 했다.

이처럼 당시 전체 개신교인 40만명 중 70%인 28만명의 성도들이 속해 있는 조선예수교장로회를 비롯한 천주교, 성공회, 장로교, 감리교, 구세군 성결교 등 대부분의 교단 교파가 신사참배에 결의했으며 한국 기독교 교단들의 친일 행적은 해방 전까지 지속됐다.

신사참배 결정적 증거 ‘고신파’

해방 후 신사참배는 한국교회의 주요한 이슈가 됐고, 원래 한 몸이던 장로교단은 40년 만에 분열됐다. 일제에 굴복해 신사참배를 했던 대부분 한국교회와 달리 당시 장로교의 친일행적에 반기를 들고 수감됐던 목회자들은 해방 후 자신들만의 교단을 만들었다. 그 증거가 바로 신사참배에 반대해 나온 예장 고신파(高紳派)다.

장로교의 이 같은 신사참배 때문에 우리나라가 남북의 분단됐다는 주장도 나왔다. 통일연구원 허문영 박사는 2015년 뉴욕포럼에서 “솔로몬의 우상숭배 이후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졌던 것처럼 한국교회가 우상숭배의 죄를 범한 그 결의를 10년 뒤 평양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는 원인으로 볼 수는 없겠는가”라며 신사참배의 결과 남과 북이 갈라지게 됐다고 시사한 바 있다.

알맹이 빠진 형식적 회개만 줄줄이

장로교는 1954년 제39회 총회가 돼서야 자신들이 했던 신사참배 결의를 철회했다. 이후 신사참배 회개 논란은 38년간 잠잠하다 1992년 한경직 목사가 종교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하며 “신사참배를 통해 우상숭배를 한 죄를 회개한다”고 밝히면서 다시금 관심을 모았다. 2006년 1월에는 기독교대한복음교회가 초대 감독이던 최태용 목사의 친일행각을 고백하고 반성했다. 최 목사는 1942년 ‘조선기독교회의 재출발’이라는 글에서 일본의 조선 지배가 신의 뜻이라며 “우리는 신을 섬기듯 일본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2007년에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가 3.1절을 기념해 신사참배에 대한 죄책고백선언문을 발표했다. 그해 9월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도 정기총회에서 신사참배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2008년 9월 24일 제주에서 열린 ‘제주선교 100주년 기념 장로교 연합감사예배’에선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과 합동, 합신, 기장 총회 총대 3950명과 제주지역 목회자 및 교인 등 모두 5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한다며 기도했다. 하지만 이 기도회도 각 교단의 공식적인 신사참배 회개 표명은 아니었다.

2015년엔 예장합동 소래노회가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했다.

2018년엔 한기총과 한교총, 한기연 등 6개 연합회가 한국교회 회개기도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도대성회를 진행했다. 회개 선언의 내용으로는 ▲80년 전 일제의 총칼에 굴복해 신사참배라는 우상숭배의 중한 죄를 범한 것 ▲6.25 한국전쟁으로 인한 남북 분단에 평화와 화해를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되지 못한 것 ▲과거 군사독재와 민주화 과정에서 보수 진보로 나뉘어 한목소리를 내지 못한 것 ▲교회 분열로 주님이 한국교회에 부여하신 시대적 선지적 사명을 바로 감당하지 못한 것 등이었다.

그러나 80년 만에 이뤄진 회개기도회에서 설교한 목사는 소속 교회 주보에 ‘한국교회는 끝까지 버티다 교회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신사참배를 했다’고 변명해 눈총을 샀다. 이에 개신교 내부적으로 이번 기도회도 형식적인 선언이었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정절을 버리고 신사참배를 한 지 올해로 81년이 지났다.

당시 신사참배에 대한 일본의 외압이 있었지만, 한국교회가 개인 혹은 총회차원에서 자발적인 신사참배를 결의한 것은 사실이다. 한국교회의 죄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해방 후에도 회개는 고사하고 오랫동안 신사참배 한 죄악을 은폐했다.

이와 관련 모퉁이돌선교회 연구원 부원장 송재선 목사는 2017년 9월 기도회에서 “신사참배에 자유로울 수 있는 한국교회와 성도는 없다”며 “심지어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던 성도라 할지라도 그러하다. 이 죄악은 너무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부분”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송 목사의 발언처럼 이 시대를 사는 한국교회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에게 경배한 과거를 지울 수는 없다. 과거사를 청산하고 하나님 앞에 잘못을 뉘우치려면 요식 행위보다 진정어린 회개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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