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 일본영사관 ⓒ천지일보(뉴스천지)

구 일본영사관

“부끄러운 과거 되풀이 않겠다는 다짐의 역사 현장”

[천지일보=김미정 시민기자] ‘목포는 항구다’라는 노래가 먼저 떠오르는 이곳 목포(木浦). 다른 전남지역과는 달리 목포에서는 근대역사를 쉽게 접할 수 있다.

1876(고종 13)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이후 부산·원산·인천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개항하게 된다. 그러나 목포는 1897년 10월 1일 고종황제의 칙령에 의한 자주적인 개항을 한 곳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다르다.

당시 목포는 조선시대 수군의 진영인 목포진이 설치된 이후 다소의 촌락을 이루고 있었던 동네다.

1897년 개항된 이후 이듬해인 1898년 일본인(주로 큐슈지방 사람)이 목포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당시 연산동인 목포진에 살고 있던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일본인이 장악하고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한다.

일본사람들이 들어오면서 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이 필요했던 일본은 만호청(1895년에 폐진된 목포진)을 빌려 사용하다가 유달산 고지대에 가건물을 지어 이관, 다시 현재 위치인 대의동에 일본영사관을 짓게 된다.

일본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공사비 14만여 원을 들여 1900년 1월에 착공, 12월에 완공한 것으로 전해온다.

구 일본영사관은 지어질 당시만 해도 높이 13.65m, 연면적 597.68㎡로 목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며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목포에서는 가장 오래된 근대건축물이다.

올해 111년째인 이 건물은 6.25전쟁 때 공중폭격으로 인해 건물 외부가 조금 손상된 모습이 눈에 띄나 여전히 견고하고 안정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장방향의 2층 구조로 지어진 건물로 창문은 타원형이며 외관은 적벽돌과 흰 벽돌로 이루어져 있고 중앙에 있는 현관이 튀어나와 있다.

당시 목포에 벽돌을 만드는 공장이 있었기에 구 일본영사관의 벽돌이 목포에서 만들어졌는지를 물었으나 조상현 목포문화원 사무국장은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한동안 러시아영사관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건물 중심부 상단에 일본 국화 문양과 일장기, 건물 내부 벽난로에 새겨진 벚꽃문양을 통해 일본영사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축된 것으로 밝혀졌다. 건물 안의 여러 글씨들을 통해서도 일본영사관으로 지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조 사무국장은 전했다.

▲ 봉안전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방공호 정문 ⓒ천지일보(뉴스천지)

한편 구 일본영사관 뒤편에는 방공호라는 인공동굴이 있다. 방공호는 1940년대 이후 태평양전쟁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이를 대비해 파놓은 인공동굴로 공중폭격에 대비한 피신용 동굴을 말한다.

방공호가 언제 조성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노적봉의 뒷자락을 뚫어서 만들어졌으며 가운데 출입구 외에 좌우로 통로가 연결되어 있다. 방공호 정문 옆에는 봉안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봉안전은 현재는 남아있지 않으며 당시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관공서, 학교 등에 천황의 사진과 칙어 등을 모셔놓고 신사참배를 못할 때 대신 참배하도록 한 곳이다.

곽순임 전남 문화관광해설사는 “당시 일본이 얼마나 군림했는가는 일본영사관의 위치만 봐도 알 수 있다”며 “한때 일본의 잔해물로 근대 문화유산이 사라질 위기도 처했었으나 과거의 잘못을 없애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역사를 사실적으로 드러내 후손들에게도 과거를 돌아보게 하고 부끄럽던 과거의 모습을 되풀이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영사관은 1981년 국가사적 289호로 지정되었으며 내년 봄 목포근대역사관 2관으로 개관하기 위해 현재 공사가 한창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