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회화 혜원 신윤복필 풍속화첩 주막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조선회화 혜원 신윤복필 풍속화첩 주막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민속박물관 ‘양조장 보고서’ 발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우리 민족과 함께 해왔던 전통주. 요즘은 가정에서 빗는 경우가 드물겠지만, 과거에는 집마다 가양주(家釀酒) 문화가 전해져 내왔다. 특히 농경사회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술이었는데, 과연 역사적으로 언제부터 술 문화가 발달했던 걸까.

◆역사 속에 담긴 가양주

최근 국립민속박물관이 발간한 ‘양조장과 술 문화’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술은 집집마다 필요할 때 빚는 가양주 형태로 전승되어 왔다. 특히 의례나 제사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술이었다. 즉 판매보다는 자가소비를 위해 술을 제조한 것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에 보면 의식을 행하는데 음주가무를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고대사회에 대한 유물이나 기록은 곳곳에서 발견되었으나 술의 이름이나 제조방법 등은 아직 전해지지 않았다.

반면 고려 시대에는 비교적 구체적인 술의 명칭이나 술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사에 개경의 번화가에 성례(成禮), 낙빈(樂賓), 연령(延齡), 영액(靈液), 옥장(玉漿), 희빈(喜賓) 등 6개의 주점을 설치했다고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소주는 고려 시대부터 내려왔다. 이 술은 몽골의 침략기인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년) 시기에 전해내려온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후 전국적으로 널리 퍼졌다. 특히 서울 이북에서는 가장 즐겨 먹는 술로 정착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양주 문화가 꽃피우게 된 것은 조선시대다. 태종과 세종, 영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사회 기강을 바로잡으려고 금주령을 내렸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농사일과 조상 숭배, 손님접대 등을 중시 여겼고 이와 동시에 가양주가 발달했다.

◆음식 조리서 속에도 등장

명절 등 특별한 날에도 등장했다. 설날에는 도소주를 먹었고, 삼짇날의 소면주, 두견주, 과하주 등과 단오의 창포주처럼 세시풍속 때에도 술은 등장했다.

조선시대에 가양주는 다양한 음식 조리서에서도 기록돼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음식 조리서인 ‘산가요록(山家要錄)’에 따르면, 음식 조리법과 함께 51가지의 술 빚기와 술맛이 변하지 않게 하는 방법 등이 기록돼 있다. ‘음식디미방’ ‘규합총서’ 등에는 조선 중기 이후 술 제조법과 효능이 기록돼 있다.

이러한 가운데 조선시대에 주막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동국세시기 ‘3월’을 보면 “소주로는 독막(현재 서울 마포구 공덕동 및대흥동 일대) 주변에서 만드는 삼해주가 가장 좋은데 수백구천 독을 빚어낸다”고 기록돼 있다.

특히 18세기 이해 장시가 활발히 열리면서 주막의 수는 점점 더 많아졌다. 사극 등에 보면 주막 입구에 주(酒)자를 쓴 표지판을 걸어 놓은 것을 본 것인데, 이는 주막의 역할을 알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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