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조정인

그때, 나는 황홀이라는 집 한 채였다

램프를 들어 붉은 반점이 어룽거리는 문장을 비췄다 인화성이 강한 두 개의 연료통이 엎어지고 하나의 기술이 탄생했다 두 점, 퍼들대는 얼룩은 일치된 의지로 서로에게 스미었다 무풍지대에서도 불꽃은 기류를 탔다 불꽃은 불꽃을 집어삼키며 합체됐다 불꽃 형상을 한 혀에 관한 속설이 꿈속에서 이루어졌다 한 줄, 문장이 타올랐다 나는 심연처럼 깊게 타르처럼 고요하게 끓을 것이다

[시평]

‘키스’의 순수한 우리말은 ‘입맞춤’이다. 왠지 ‘입맞춤’은 가볍게 입술과 입술을 서로 마주치는 정도로 생각이 된다. 그래서 통상 ‘키스’가 지닌 그 강렬함이 없는, 다만 가벼운, 혹은 정겨운 행위 정도로 느껴지는 단어이다.

또한 옛 우리 조상들이 쓰던 ‘키스’의 한자투(漢字套)의 말은 ‘접문(接吻)’이다. 입술과 입술이 서로 맞닿는다는 뜻의 접문(接吻). 우리 선인들이 쓰던 말인데도, 이제는 전혀 낯이 선 말이 되어버리고 만 단어. 아무러한 감흥도 없는, 다만 그 뜻만 담고 있을 뿐, 아무러한 감정을 느끼지를 못하는 그런 말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이에 비해 ‘키스’라는 외래어는 왠지 강렬한 감흥을 담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생각하면 마치 황홀한 한 채의 집이라도 지을 수 있는 양, 그래서 인화성이 강한 두 개의 연료통이 엎어지며 타오르는 불꽃 마냥, 불꽃이 불꽃을 집어삼키며 합체되는 강렬한 어휘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어디 그 강렬함이란 다만 입맞춤, 키스에만 있겠는가. 서로가 서로에게 스미게 되고, 그래서 어쩔 수 없는 무풍지대를 이룬다면, 강렬함으로 서로 불타오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화가가 색채를, 시인이 언어를, 아니 음악가가 멜로디를 만나, 그래서 서로 스미게 된다면, 그래서 무풍지대를 이루는 그런 상태가 된다면, 서로의 뜨거운 인화성으로 그 무엇보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무엇이 되지 않겠는가. 늘 우리는 강렬한 키스와 같은, 그렇게 타오르는 삶 스스로의 안에서 이루어나갈 때, 우리의 삶, 진정 뜨거운 한 생애를 이룰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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