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와당연구가

고구려 명문 와당은 그리 흔하지 않다. 초기 유물인 한나라 영향의 권운문(卷雲紋)에서 많이 보이지만 중기에 이르러서는 유례가 드물다. 여기에 소개하는 ‘십곡민 조(十谷民 造)’와당은 고구려 당시 계층사회구조를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와당과 동일한 와당의 파편이 1945년 이전에 이수원자남유지(梨水園子南遺址)에서 수습되어 여러 전문가들이 논문에 인용되어 왔다. 그런데 이번 소개하는 와당은 완전한 것으로서 이를 보충하는 자료가 될 것이다.

‘십곡민’이라는 뜻은 무엇일까. 고구려인들은 촌과 계곡에 나뉘어 살았으며 이들은 곡민(谷民) 성민(城民)으로 분류되었다. 또 중국 측 연구 자료를 보면 외국에서 포로로 잡혀 온 백성들이나 하천 계급은 성 밖 산간에 모여 살았는데 이들을 ‘곡민’이라고 호칭했다는 주장도 있다. (至于城邑以外的广大地区,应该主要是当地的被征服土著民户,往往以"谷民"称之)

이 기와를 보면 열 개 의 곡민 부락에서 와당을 만들어 진공한 셈이 된다. 이들은 대대로 기와를 구어 진공해온 기술자 집단으로도 해석된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십곡민 글자에 이어 나타나는 ‘운인(云人)’이란 명문이다. 운인이란 ‘십곡민도 또한 사람’이란 뜻인가. 아니면 조와를 한 장인의 이름인가.

십곡민 와당 (제공: 이재준 와당연구가) ⓒ천지일보 2020.1.14
십곡민 와당 (제공: 이재준 와당연구가) ⓒ천지일보 2020.1.14

두 명문 중 ‘人’을 뒤집어 보면 두 팔을 땅에 대고 노동하는 형상이다. 중노동의 뼈아픈 고통 속에서 기와를 만들며 이 두자를 만들어 넣은 것인가. 그렇다면 그 기지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와당을 받는 고구려 관리들이 이를 보고도 받아 기와로 쓴 것은 이들의 고통을 이해한 때문이 아닐까.

이 기와는 고구려 와당 가운데 이형이다. 6개의 간판으로 내구를 구획하고 그 사이에 고졸한 예서체 명문을 배치했다. 자방은 일조의 선문 동심원에 글자마다 하나씩 뾰족한 장식을 배치했다. 간판의 끝은 동그란 고리를 이루고 있다. 모래가 많이 섞이지 않은 경질의 적색이다.

경(徑) 14.5㎝, 자방폭 2.5㎝, 간판장 3,5㎝, 주연폭 3.5㎝, 두께 3.5㎝, 자경(字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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