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 

 

동지섣달 긴긴밤이란 노래도 있지만 작금의 남북관계는 해동의 기미가 보이질 않고 있다. 한국 정부의 끊임없는 구애에도 평양은 요지부동이다. 오히려 우리를 걸고 들면서 마치 동족이 아닌 남처럼 무시하고 들고 있으니 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얼마 전 북한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김정은 국무위원장 생일 축하 메시지를 전달하는 우리 정부의 노력을 노골적으로 폄훼했다. 생일 메시지 전달을 계기로 경색된 북미 대화의 틈을 열고, 중재 역할과 남북협력을 도모하는 정부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은 모양새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10일 2박 3일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김 위원장의 생일 축하 의미를 담은 메시지를 전달해달라고 당부했다며 지난 9일 적절한 방법으로 북측에 메시지가 전달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외교적 절차에 따른 정당한 발표였다. 이에 따라 한동안 주춤했던 북미대화와 남북대화에 작은 틈바구니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증폭됐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방미 기간 정 실장과 ‘깜짝 만남’을 하면서 모종의 중재 역할을 맡긴 것 아니냐는 기대 섞인 관측도 제기됐다.

하지만 이런 예측은 문자 그대로 일장춘몽이었다. 북한 김계관 외무성 고문은 11일 정 실장의 발표 하루 만에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담화를 발표하고 “새해벽두부터 남조선당국이 우리 국무위원장에게 보내는 미국대통령의 생일축하인사를 대 긴급 전달한다고 하면서 설레발을 치고 있다”며 일말의 기대감을 사정없이 깎아내렸다. 김 고문은 특히 “남조선당국이 숨 가쁘게 흥분에 겨워 온몸을 떨며 대 긴급통지문으로 알려온 미국 대통령의 생일축하 인사라는 것을 우리는 미국 대통령의 친서로 직접 전달받은 상태”라면서 우리의 전달 노력이 하등 중요하지 않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면서 “한 집안 족속도 아닌 남조선이 우리 국무위원장에게 보내는 미국대통령의 축하인사를 전달한다고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는데 저들이 조미(북미)관계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보려는 미련이 의연 남아있는 것 같다”고 비꼬았다. 또 “수뇌들 사이에 친분관계를 맺는 것은 국가들 간의 외교에서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남조선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사이의 친분관계에 중뿔나게 끼어드는 것은 좀 주제넘은 일이라고 해야 겠다”고 힐난하기도 했다.

아울러 김 고문은 북미 대화에 대해서는 “우리는 미국과의 대화탁(탁자)에서 1년 반이 넘게 속히우고(속임을 당하고) 시간을 잃었다”며 “명백한 것은 이제 다시 우리가 미국에 속히워 지난 시기처럼 시간을 버리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또 “국무위원장은 우리 국가를 대표하고 국가의 이익을 대변하시는 분으로서 그런 사적인 감정을 바탕으로 국사를 논하지는 않으실 것”이라며, 친서로 북미 대화가 시작될 것이라는 전망에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다만 김 고문은 북미 대화 성립에 대해 “미국이 우리가 제시한 요구사항들을 전적으로 수긍하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미국이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지난해 미국에게 요구한 상응조치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에둘러 표현했다.

김 고문은 미국에 대해 ‘새로운 셈법’을 다시 한번 밝힌 셈이지만, 김 위원장이 지난 12월 31일 당7기 5차 전원회의에서 북미 대화의 장기화를 기정사실화하고 내부적으로 자력갱생과 국방건설을 중심으로 한 ‘정면 돌파전’을 하고 나서겠다고 한 만큼 대화 여지보다는 기존의 조건을 재차 반복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따라 지난해 남북관계가 소강 국면에 이르면서, 북미관계 촉진에 주력했던 정부로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밝힌 남북협력 방안에 대한 구상마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울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온다. 북한 당국이 과연 한국을 무시하고 미국과 잘 될 것인지 두고 볼 일이지만, 동족을 외면한 그 죄는 무거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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