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고전 춘향전의 탐관오리 변사또가 실존인물이었다면 봉고파직 당할 때 매우 억울해 했을 것이다. 기생의 딸에게 수청 들라 한 것은 타 지역 수령들도 즐겨했던 짓이 아닌가. 얼마든지 축첩이 가능했던 시대의 ‘관행’이었다.

사또 생일날 기름진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인근 수령들과 양반들을 불러 잔치 한 것도 관행이었다. 그런데 어사는 이를 백성들의 피며 고혈이라고 비판한다.

항아리 속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쟁반 위의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물이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성소리도 높구나(淸香旨酒千人血 細切珍羞萬姓膏 燭淚落時人淚落 歌聲高處怨聲高)

춘향전에서 절정의 통쾌미는 어사 출도로 변사또를 응징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어디 변사또뿐이랴. 당시 전국 탐관오리들의 횡포는 백성들의 피를 짜고 재물을 훔치는 스킬이 허가 낸 도둑 이상이었다.

노비가 아전을 고발하고 아전이 사또를 고발하면 누가 벌을 받았을까. 주인을 고발한 부도덕한 자로 매도돼 오히려 고발한 자가 벌을 받았다. 노비가 주인을 고발하지 못하게 한 것이 조선의 불문율이었다. 모든 뇌물과 부정행위는 모두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눈감고 면죄부를 받은 것이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靜庵 趙光祖)는 관행을 깨뜨리고 조정을 개혁하려다 젊은 나이에 죽음을 당했다. 그는 먼저 반정 원로공신들을 상대로 개혁하려했다. 공신 작호가 부당하게 내려진 76명에 대해 공훈을 삭제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조광조 등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권력의 핵심에 있던 최고 실세 박원종 등 공신세력들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었다.

‘권좌에 올라 모든 국정을 다스리는 데 이(利)를 먼저 하고 있으므로 이를 개정하지 않으면 국가를 유지하기가 곤란 합니다’

중종은 처음 개혁파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점점 공신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자 불안함을 느끼고 갑자기 신진사류 일파를 숙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제일먼저 없앤 것이 바로 개혁의 선봉 조광조였다.

조선은 18세기에도 세계 각국의 부상에 편승하지 못하고 관행을 중시하다 망하고 말았다. 가렴주구로 민초들의 고난은 커져 갔다. 비리를 고발하고 집권층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은 모두 누명을 씌워 제주도나 땅 끝 마을로 귀양 보내 사회와 단절시키고 언로를 막았다.

실학사상과 근대화를 외쳤던 지식인들은 평생 땅을 치고 한을 안고 살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정희와 정약용이다. 다산은 궤도를 잃은 정치, 잘못된 관행, 사리사욕을 챙기는 탐관들을 비판했다. 그러나 뇌물에 심취했던 세도가들은 다산을 껄끄럽게 여겨 17년 동안이나 서울과 괴리시킨다.

여당이 총선을 앞두고 영입한 30대 초반의 전직 소방관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자녀 입시비리 의혹을 놓고 ‘관행’이라고 옹호해 비판이 일고 있다.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조국 정국을 바라본 소회를 묻는 질문에 ‘많은 언론에서 검찰에서 새어 나온 정보로 모든 학부모가 그 당시에 관행적으로 해온 행위들을 너무 지나치게 부풀렸다’고 답했다고 한다.

비리의 백화점이라고 까지 비판받는 조국 전 장관의 서류 조작 등 일탈을 관행이라고 치부하는 데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정의를 모토로 해야 할 젊은 정치인이 자신을 영입한 여당비위를 맞추기 위해 벌써부터 공정한 사고를 잃은 것인가. 그렇다면 그 젊은이는 정치를 포기하는 것이 옳다.

정치인부터 특권층이나 자당의 비리를 옹호하고 묻어 주려는 관행 적폐를 타파해야 한다. 국민들의 준엄한 요구를 여당은 모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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