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재욱 충남대 명예교수
무척이나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황금 돼지의 해’ 기해년(己亥年)을 보내고, ‘하얀 쥐의 해’ 경자년(庚子年) 새해를 맞이하며, 조선 시대의 주요 사건들에 연계된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 이야기들이 떠올려진다.
천지(天地)와 연계된 십간십이지에서 천간(天干)을 일컫는 십간(十干)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이다. 그리고 지지(地支)를 일컫는 십이지(十二支)는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로 ‘띠’와 연계돼 있다. 사람이 태어난 해의 지지를 동물 이름으로 상징해 부르는 띠는 쥐띠·소띠·범(호랑이)띠·토끼띠·용띠·뱀띠·말띠·양띠·잔나비(원숭이)띠·닭띠·개띠·돼지띠로 구분된다.
서양의 하루 시간 단위는 24시간이지만, 동양에서는 하루 시간이 십이지로 2시간씩 나누어 밤 11시부터 1시까지인 자시(子時)를 시작해서 다음날 밤 9시부터 11까지인 해시(亥時)로 구분해왔다.
십간과 십이지의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육십간지(六十干支)’는 갑자(甲子)로 시작해 을축(乙丑), 병인(丙寅), 정묘(丁卯) 순으로 이어져 육십 번째 계해(癸亥)로 마감되고, 천간의 ‘갑(甲)’과 지지의 ‘자(子)’가 만나는 갑자해로 다시 시작된다. 그래서 육십간지를 지내고 맞이하는 예순한번째 해를 환갑(還甲)이라고 부르며 축하 잔치를 벌여온 것이 우리네 관습이었다. 천간과 지지는 각각 10개와 12개로 둘 다 짝수이기 때문에 육십간지의 조합에서 홀수 번은 홀수끼리 짝수 번은 짝수끼리 조합이 이룬다. 그래서 갑자(甲子)나 을축(乙丑)의 조합은 있지만 갑축(甲丑)이나 을인(乙寅) 등의 조합은 없는 것이다.
8.15 해방 이후 우리 사회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들의 명칭은 6.25 한국전쟁(1950년), 4.19 혁명(1960년), 5.16 군사정변(1961년), 7.4 남북공동성명(1972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6.29 선언(1987년) 등에서 보는 것처럼 사건 발생 날을 중심으로 명명되고 있지만, 조선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에는 간지 명칭이 많이 쓰여 왔다. 대표적인 예로 조정의 신하들이나 선비들이 서로 싸우며 반대파에게 화(禍)를 입힌 4대사화(四大士禍)를 들 수 있다. 조선 최초의 사화로 기록되고 있는 무오사화(戊午士禍)는 무오년인 1498년(연산군 4년) 왕의 생존 시 기록된 사초(史草)를 발단으로 일어난 사화로 신진 사류(士類)가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갑자년인 1504년(연산군 10년)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는 폭정과 황음에 빠져있던 연산군이 대신과 삼사를 대규모로 숙청한 사화이다. 기묘년인 1519년(중종 14년)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는 훈구파에 의해 신진 선비들이 숙청된 사건이다. 을사년인 1545년(명종 즉위년)에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외척들 간의 싸움으로 대윤과 소윤의 반목으로 발생해 소윤이 대윤을 숙청한 사화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임진년인 1592년(선조 25년)에 침입한 일본과의 전쟁을 일컫는다. 임진왜란 중 화의교섭이 결렬돼 정유년인 1597년(선조 30)에 일본이 2차로 일으킨 왜란은 정유년의 재침에 연계해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 부른다. 정묘호란(丁卯胡亂)은 정묘년인 1627년(인조 5년)에 청(淸)나라가 쳐들어온 사건이다. 그리고 병자년인 1636년(인조 14년)에 청나라가 다시 침입해 정묘호란보다 더 심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는데, 병자호란은 병자년에 일어나 정축년에 끝났기 때문에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은 갑신년인 1884년(고종 21년)에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들이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며, 을미사변(乙未事變)은 을미년인 1895년(고종 32년)에 일본이 조선 내의 세력 확장을 위해 명성황후(민비)를 시해한 정변을 일컫는다.
‘삼천갑자(三千甲子) 동방삭(東方朔)’이란 말도 있는데, 이 말은 중국 전한(前漢) 시대의 속설로 당대 문인으로 알려져 있는 동방삭이 갑자년(甲子年)을 삼천 번 넘기며 장수했다는 설화로 인간의 장수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 인류 사회가 육십간지(60년)를 훌쩍 넘어 장수하는 ‘100세 시대’로 열리며, 모든 인류가 간직하고 있는 주요 소망 중 하나인 ‘수명 연장의 꿈’이 조금씩 현실화돼 가고 있다. 흐르는 세월은 우리를 삶 속으로 밀어 넣었다가, 나중에는 아무 것도 없는 무(無) 속으로 밀어 넣는다고 한다.
경자년을 맞이해 ‘십간십이지’와 ‘육십간지’를 떠올리며 새해의 새로운 꿈과 희망으로 ‘100세 삶’을 간직해 보고픈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