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아차산(阿且山)은 서울의 대표적 산성 유적이자 명산이다. 강북은 물론 강남인들도 즐겨 찾는 등산 코스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이 산을 경계로 서울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가 나뉘어져 있다.

정상에서 용마산으로 오르면서 고구려 보루가 조사돼 여러 해 발굴조사가 이뤄졌으며 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뜻 밖에 고구려식의 축성 방법을 알게 됐고 모두 17개에 달하는 보루는 독특한 형식의 구조임이 파악되기도 했다.

아차산에서 찾아진 명문기와는 이 산의 비밀을 풀어줬다. 바로 ‘한산(漢山)’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였다. 한산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 한산주(漢山州)를 지칭한다. 이 명문이 등장하기 전에는 학자들이 한산을 지금의 북한산으로 비정하고 있었다.

‘한산’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에 여러 차례 기록되고 있다. 온조왕이 하남 위례성에 일시 도읍을 정했다가 다시 ‘한산으로 옮겼다’는 내용(移都漢山)도 그것이다. ‘한산’으로 수도를 옮겼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한산과 연결된 가까운 지역에 왕성인 하북위례성이 있다는 근거가 된다.

백제 개로왕은 475AD 9월 위례성 아래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즉 대병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남하한 장수왕이 위례성을 탈출해 도망가던 개로왕을 사로잡아 아차산 아래서 목을 벤 것이다. 당시 개로왕이 하남 위례성에서 있었다면 장수왕은 한강을 건너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고구려군사의 위세를 보고 몸을 피신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을 것이 아닌가. 왕성이 강북에 있었으므로 고구려는 개로왕을 잡아 참수할 수 있었다. 아차산의 비극은 개로왕시기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지 못한 안보의 취약성을 교훈으로 남기고 있다. 만약 개로왕이 고구려의 남침 대로에 더 튼튼한 관방을 쌓고 대비했다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고구려의 백제 공격로를 조사하고 있다. 북에서 아차산으로 내려오는 군사대로는 연천 - 동두천 – 양주 – 의정부 – 중랑구 - 아차산이다. 이 루트에 성을 확고하게 쌓고 많은 군사를 배치했다면 장수왕의 기병 부대를 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후에 고구려 세력을 몰아낸 신라는 이 대로에 철옹성을 구축, 아차산을 수호했다. 백제의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실지 회복을 위해 대 부대를 이끌고 내려온 온달장군도 결국 아차산을 탈환하지 못했다. 675년 당나라 20만 연합대군이 남하했을 때도 신라는 연천의 매초성에서 이들을 차단, 신병기로 대파시켰다. 매초성 전투는 세계전사에 기록될 일이나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중국 눈치를 보느라 축소 기록하고 말았다.

새해 문 대통령이 의인(義人)으로 칭호 받는 이들과 아차산을 산행했다. 학교 화재 때 학생을 구한 이주영 교사 등 ‘의인’ 7명이다. 의인들을 격려하고 올해 감동적인 일이 많이 일어났으면 하는 희망을 가졌는지 모른다. ‘의(義)’란 무슨 뜻일까. 공자는 ‘의’를 인간의 실천 원리로 정의했으며 ‘군자는 오직 의를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했다. 말로는 ‘의’를 숭상한다고 하면서 실천하지 않으면 이는 불의(不義)다. 문재인 정부는 구랍 연동형선거법과 고위공직자 범죄 수사처 설치법을 강행 통과시켰다. 연초부터 야당과 국민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대통령의 이런 독선과 폭주가 과연 의로운 행동이었을까. 대통령은 아차산을 등정하면서 안보가 허술해 왕도를 잃은 백제 개로왕의 교훈을 회고했는지 모른다. 대통령의 아이러니한 두 얼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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