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2월 6일이면 열리는 ‘와이탕이 데이(Waitangi Day)’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20.1.3
해마다 2월 6일이면 열리는 ‘와이탕이 데이(Waitangi Day)’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20.1.3

해마다 2월 6일이면 뉴질랜드에서는 12~13톤에 달하는 길고 큰 카누를 젓는 행사가 열린다. 이 행사에서 카누를 젓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좀 특이한 면이 있다. 오직 50여명의 건장한 남자 마오리족 전사들로만 구성돼 있다는 점이다.

거센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는 그들의 표정에는 팽팽한 긴장감과 설렘으로 가득 차있다. 육중한 노를 저어가면서 틈틈이 마오리 특유의 표정을 지으면서 큰 소리로 외치기도 한다. 마오리족의 정체성과 용감성을 나타낸다 하겠다.

이날은 마오리족뿐만 아니라 뉴질랜드 이민자들이 가장 기뻐하고 들뜬 날이기도 하다. 민족 간 차이와 갈등을 해소하고 ‘뉴질랜드’가 탄생한 날이기 때문이다. 이를 ‘와이탕이 데이(Waitangi Day)’라고 부른다. 1974년부터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민족 간 차이와 갈등을 해소하고 ‘뉴질랜드’가 탄생한 날이기 때문이다. 이를 ‘와이탕이 데이(Waitangi Day)’라고 부른다. 1974년부터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20.1.3
민족 간 차이와 갈등을 해소하고 ‘뉴질랜드’가 탄생한 날이기 때문이다. 이를 ‘와이탕이 데이(Waitangi Day)’라고 부른다. 1974년부터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20.1.3

뉴질랜드 최초의 이민자 마오리족

뉴질랜드 최초의 이민자들은 마오리족이었다. 그들은 수천 년 전 폴리네시아에서 카누를 타고 뉴질랜드로 왔다. 그러나 부족 간 끊임없는 갈등으로 인해 바람 잘 날 없을 만큼 치열한 다툼과 전쟁의 연속이었다.

18세기에 이르러 유럽인들이 뉴질랜드에 오기 시작했다. 1769년에는 영국 해군의 장군이었던 제임스 쿡이 뉴질랜드를 방문하기도 했다. 1837년 영국인 에드워드 와케필드는 뉴질랜드 이민을 독려했다. 그 반면에 그는 마오리 사람들을 속여 뉴질랜드의 토지를 마음대로 팔기도 했다.

뉴질랜드에 온 영국인을 비롯한 유럽인들은 정착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이미 정착해 있던 마오리족과의 언어·문화적 충돌은 난제 중의 난제였다. 특히 표현의 차이는 늘 이어지는 분쟁의 원인이 됐다. 또 생활에 필요한 도구나 음식을 구하기 힘들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마오리족들로부터 필요한 물건과 음식을 빼앗는 일이었다. 이는 궁극적으로 마오리들을 속이거나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야말로 혼란과 무질서의 연속이었다. 이렇듯 원주민들과 유럽에서 온 백인들 사이에는 갈등과 무력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주권의 소유, 토지 소유와 양도에 대한 부분은 늘 그들 사이에 쟁점이 되었다.

생각의 차이로 인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와 더불어 당시에는 사회적 변화도 두드러졌다. 고래잡이가 성황을 이뤘으며 금광개발을 하려는 사업가들이 뉴질랜드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몰려들 때였다.

 

지금으로부터 180년 전인 1840년 2월 6일 뉴질랜드에서 역사적인 일이 벌어진다. 국가 탄생의 결정적 계기인 ‘와이탕이 조약’이 체결되기 때문이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20.1.3
지금으로부터 180년 전인 1840년 2월 6일 뉴질랜드에서 역사적인 일이 벌어진다. 국가 탄생의 결정적 계기인 ‘와이탕이 조약’이 체결되기 때문이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20.1.3

와이탕이 조약 체결

지금으로부터 180년 전인 1840년 2월 6일 뉴질랜드에서 역사적인 일이 벌어진다. 국가 탄생의 결정적 계기인 ‘와이탕이 조약’이 체결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세계의 많은 나라의 건국일 또는 독립기념일은 전쟁과 연계돼 있다. 하지만 뉴질랜드는 좀 다르다. 당시 뉴질랜드는 정부는 물론 통합된 지도자조차 없었다. 이는 유럽 이주민들과의 소통과 협조에 한계를 가져오게끔 하였다.

또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프랑스가 뉴질랜드 정복을 계획하고 있다는 첩보가 있었다. 프랑스로부터 정복이 이뤄질 경우 무자비한 횡포, 침탈과 학살이 있을 것이란 정보도 있었다. 마오리족 일부 추장들은 이에 심한 우려와 위협을 느꼈다. 그들은 영국의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느꼈다.

1831년에 13명의 마오리족 추장은 윌리엄 4세에게 프랑스의 침공에 대한 보호를 청원하기도 했다. 영국 정부도 프랑스의 뉴질랜드 식민지화를 견제하고 있었던 차에 다급함을 느끼게 된다. 이런 배경 하에서 북섬 와이탕이 지역에서 각지에 사는 46명의 원주민 마오리족 추장과 영국에서 건너 온 부총독 윌리엄 홉슨과 조약이 이뤄진다. 바로 ‘와이탕이 조약(Treaty of Waitangi)’이다.

양측이 문서에 서명을 함으로써 이민자와 마오리족이 뉴질랜드에서 함께 살기로 결합했다고 할 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840년 초 영국은 해군 장교였던 윌리엄 홉슨을 뉴질랜드 영사 겸 부총독으로 위임한다. 그는 뉴질랜드에 도착하자마자 1833년부터 7년 동안 영국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노력해오던 제임스 버스비와 접촉을 한다.

제임스 버스비는 뉴질랜드 북섬의 와이탕이 지역에 오랜 기간 동안 살고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은 당시 상황을 충분히 논의했는데 영국인과 마오리족과의 분쟁이 식을 날이 없음에 공감했다. 그래서 분쟁을 줄이고 뉴질랜드를 영국이 식민지화할 수 있는 조약을 만들기로 협의를 한다.

이후 마오리 족장들을 초청해 회의를 했지만 회의는 늘 난관에 부닥쳤다. 언어문화의 차이로 야기되는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조약에 사용되는 단어나 용어를 영어와 마오리어로 해석하는 데만 며칠씩이나 걸렸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마침내 조약이 작성되고 번역돼 서명을 받게 된다.

그러나 만든 문서가 뉴질랜드 전체의 약 570명에 달하는 모든 마오리족 추장으로부터 서명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정당성 여부가 관건이었다. 이에 영국 정부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 정부와 논의 끝에 그들은 많은 마오리족 추장에게 정당성을 부여받고자 8개월 동안 남·북섬을 샅샅이 돌아다닌다. 이 과정에서 와이카토 지역 추장 39명은 문전박대를 하면서 위협까지 한다.

와이카토 지역의 추장으로부터 서명을 받을 수는 없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530명 이상의 마오리 추장들로부터 서명을 받는 데 성공한다.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였다. 이 조약으로 마오리들은 유럽인들에게 협조할 수 있었으며 유럽인들은 원만히 정착할 수 있었다. 이 조약은 오늘날 뉴질랜드 헌법 제정 및 개정, 마오리족의 정치계 진출 등 정치적 관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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