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驛)

한성기(1923 ~1984)

푸른 불 시그널이 꿈처럼 어리는
거기 조그마한 역(驛)이 있다.

빈 대합실(待合室)에는
의지할 의자(椅子) 하나 없고

이따금
급행열차(急行列車)가 어지럽게 경적(警笛)을 울리며
지나간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아득한 선로(線路) 위에
없는 듯 있는 듯
거기 조그마한 역(驛)처럼 내가 있다.

[시평]

지금은 많이 없어진 풍경이다. 하루에 한 번이나 기차가 설까 말까 하는 작은 역, 일컫는 바 간이역이라는 것이 궁벽한 시골에는 있었다. 어쩌다 서지도 않는 급행열차가 어지러이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역. 대합실에는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이, 다만 먼지가 쌓여 있는 나무의자만이 쓸쓸히 지키는 작은 역. 그러나 이렇듯 비록 작은 역이지만, 우리 어린이들에게는 더 먼 세상으로 떠나는 꿈을 꾸곤 하던, 그런 곳이기도 하다.

간이역, 어쩌다 들어오는 기차와 함께 우리에게 아련한 꿈을 실어 날라주던 곳, 간이역. 이 역에서 기차를 타면,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던 서울에도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을 꾸던 곳, 간이역. 눈이 오고, 또 비가 오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도, 아득히 알 수 없는 세상으로 이어지듯 뻗어나간 선로(線路) 위에, 그저 없는 듯 있는 듯 서 있는 작은 역.

간이역은 지금은 기억 속에서도 아물거리는 우리의 어린 날의 꿈인지도 모른다. 마치 작은 역 마냥 우두커니 서서, 아스라이 뻗어나간 철로를 바라보며, 머나먼 세상을 꿈꾸던, 우리의 어린 시절의 자화상, 바로 우리의 그 모습이 그 간이역이었는지도 모른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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