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용 시민주권 홍보기획위원장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 이방원은 타고난 마키아벨리스트였으나 재임 중 후계문제를 놓고 번뇌에 허덕였다. 태조 이성계의 8남 5녀 중 5남인 이방원은 어릴 적부터 총명한데다 무예에도 뛰어났다. 게다가 정치적 후각도 남달라 이성계의 쿠데타 과정에서 최측근 참모로 활약했다.

특히 이방원은 공양왕 4년(1392) 이성계의 낙상을 계기로 고려왕실 가신들이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역이용하여 정몽주를 참살함으로써 조선조 개국에 결정적 공을 세웠다. 이 덕에 이방원은 개국공신 1등에 올랐다.

그러나 이성계는 개국 후 뜻밖에도 8형제 중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다. 개국공신으로서 당연히 후계자가 될 것으로 생각했던 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석과 방번을 죽인 뒤 우여곡절 끝에 3대 임금에 등극한다. 태조는 자신이 저질렀던 형제간의 골육상쟁에 회한이 맺혔던 듯 후대에는 이 같은 행태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정비 1명과 후궁 9명 등 12명의 부인으로부터 무려 12남 17녀를 낳았다. 이토록 왕자와 공주가 많았으니 그가 형제간의 권력다툼을 미리 교통정리하는 데에 골몰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이해할만하다. 특히 정비인 원경왕후 민씨로부터 낳은 네 아들을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과연 누구를 후계로 삼아야 신생 조선국의 왕권이 기틀을 잡을 것인가?

특히 장남 양녕, 차남 효령, 3남 충녕대군 모두가 나름대로 특징이 있었다. 장고를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은 장자상속이었다. 태종은 재위 4년차에 겨우 열 살인 양녕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런데 천성이 자유분방한데다 부왕의 심중에는 모든 면에서 탁월한 충녕에게 왕좌를 물려주지 못한 아쉬움이 자리하고 있음을 눈치 챈 양녕은 방황한다.

이후 그는 이미 역사에 널리 알려진 대로 유교적 질서에서 일탈한 행동 등이 빌미가 되어 폐세자된다. 그 뒤를 이어 3남 충녕이 세자로 책봉되는 데 바로 그가 조선조 최고의 성군인 세종이다.

서설이 길어졌지만 조선왕조 초기의 후계구도 혼란사를 거론한 것은 오늘날 북한의 실상과 여러모로 흡사해서이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북한의 ‘3대 세습체제’는 구한말 이후의 북한 역사를 살펴보면 수긍이 가기도 한다. 북한은 조선왕조 패망 이후 35년간의 일제식민치하를 거친 후 다시 ‘김일성왕조’라는 전제주의 체제로 회귀했다.

즉 북한주민은 오늘날의 서구적 민주주의라는 시스템 자체를 경험해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또한 외부와의 단절로 대부분의 주민들은 아직도 봉건시대적 사고에 머물고 있다. 북한주민은 북한체제를 조선왕조의 뒤를 이은 ‘김씨왕조’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김씨왕조의 둘째 왕자 김정철(30)이 지난 14일 싱가포르에서 영국 팝스타의 공연을 관람하다 한국 취재진의 카메라에 포착됐다.

이 뉴스를 보며 난 태종의 아들 삼형제가 떠올랐다. 그리고 태종의 세 아들과 김정일의 세 아들의 행태가 600년의 시차를 두고 그토록 절묘하게 오버랩될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결과적으로 3남인 충녕이 왕위를 계승했듯 김씨왕조에서도 3남인 김정은이 후계자가 됐다. 세자로 책봉됐다가 둘째 동생에게 세자직을 넘겨준 양녕은 정치보다는 시, 서예 등 예술에 탐닉하고 일생을 풍류객으로 살았다. 마찬가지로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도 해외를 떠돌며 자본주의의 퇴폐를 탐닉하며 살고 있다.
그의 행태를 굳이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홍콩, 마카오 등지에서 울분을 삭여야하는 처지를 보면 양녕대군의 심사가 떠오른다.

또한 역시 장형 양녕이 실권하는 것을 지켜본 효령도 혹시나 ‘내게 기회가 올까’하고 온종일 글공부에 전념하는 등 근신했다. 본디 심성이 착하고 유약했던 효령은 아버지 태종의 심중을 헤아리고 권좌의 욕심을 포기한다. 하지만 미련은 남는 법. 그는 이를 극복하기위해 불심에 빠져든다.

북한의 기준으로 보면 퇴폐적 자본주의의 전형이라 할 팝송과 서구적 스포츠에 빠진 김정철을 보면 무욕의 종교인 불교에 심취했던 효령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렇다고 해서 김정은이 세종이 된 충녕이란 말은 결코 아니다.

아직도 600년 전의 중세적 도그마에 빠져 있는 북한이 동족으로서 한심하고 안타깝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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