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기해년(己亥年)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새해가 되면 ‘항상 좋은 일만 가득했으면’ 하는 것이 모든 이들의 염원이지만 한 해를 뒤돌아보면 우리 사회는 갈등과 분열, 충격적인 사건들로 잠시도 평온할 틈이 없었다. 본지는 연말을 맞아 ‘유치원 개학연기 사태’부터 ‘화성연쇄살인범’, 국민을 둘로 나눈 ‘조국 사태’에 이르기까지 올해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쳤던 10대 이슈를 키워드로 재조명해봤다.

지난 1980년대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고 우리나라 범죄사상 최악의 미제사건으로 남았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드러났다. 18일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현재 수감 중인 A(50대) 씨를 특정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7차 사건 당시 용의자 몽타주 수배전단. (출처: 연합뉴스)
지난 1980년대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고 우리나라 범죄사상 최악의 미제사건으로 남았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드러났다. 18일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현재 수감 중인 A(50대) 씨를 특정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7차 사건 당시 용의자 몽타주 수배전단. (출처: 연합뉴스)

DNA분석기법 발달로 증거 찾아

5·7·9차 사건 이춘재 DNA 확인

살인 14건 성범죄 30여건 자백

모방범죄 8차도 이춘재 소행

고문 등 당시 수사 행태 확인

[천지일보=홍수영 기자] 2019년 9월 18일은 대한민국 과학수사의 기념비적인 날로 기억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장기 미제사건이자 시민들의 공분을 샀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 DNA 검사 결과 특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1986년 1차 사건 발생 33년 만의 일이다.

진범으로 확인된 이는 이춘재(56). 1994년 처제를 성폭행한 뒤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재소자였다.

화성 5·7·9차 사건의 범죄 DNA와 이춘재의 것이 일치함이 확인됐고, 경찰의 끈질긴 조사 끝에 이춘재가 범행 일체를 자백하면서 지난 17일 이 사건은 ‘이춘재연쇄살인사건(이춘재 사건)’으로 새롭게 명명됐다.

이춘재 사건은 1986년 9월부터 1991년 4월까지 당시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사무소 반경 내 3㎞ 4개 읍·면에서 10~70대 여성 10명이 처참히 살해당한 역대 최악의 연쇄살인 사건이다.

이춘재 사건은 종종 ‘개구리소년 실종사건’과 영화 ‘그놈 목소리’로 유명한 ‘이형호 군 유괴사건’ 등과 함께 국내 3대 미제사건으로 꼽힌다.

이 사건이 수십년이 지나도록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히지 않은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 우리나라 최초의 연쇄살인이라는 점, 피해자의 시신에 입으로 담지 못할 몹쓸 짓을 하는 등 범행이 매우 잔혹했던 점 등을 꼽을 수 있겠다.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 이춘재. (출처: 연합뉴스)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 이춘재. (출처: 연합뉴스)

◆이춘재가 벌인 잔혹한 범죄들

1986년 9월 19일 경기도 화성 태안읍 안녕리(안녕동)의 어느 풀밭. 71세의 여성 노인의 시체가 발견된다. 발견됐을 당시 모습은 참혹했고 기이했다. 하의는 벗겨져 있었고, 목이 졸려 살해된 흔적이 보였다.

이춘재는 첫 사건 불과 한 달 뒤인 10월 20일 두 번째 범행을 벌인다. 범행 사흘 뒤인 진안리의 한 농수로 안에서 피해자의 시신이 발견된다. 1차와 마찬가지로 피해자의 하의는 벗겨져 있었다. 이춘재의 범행은 과감해져 이 사건부터는 피해자에게서 성범죄의 흔적이 발견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범행에 스타킹 등 피해자 옷가지를 이용하는 이춘재 만의 ‘시그니처’도 드러난다.

자신의 범행에 탄력을 받은 이춘재는 같은 해 12월 이틀 간격으로 3·4차 사건을 저지른다. 4차 사건은 며칠 뒤에 피해자가 발견됐으나, 안타깝게도 3차 사건은 수개월이 흐른 이듬해인 1987년 4월에야 피해가 확인됐다.

1987년 1월에도 5차 사건을 벌인 이춘재는 짧은 기간 동안 여러 건의 성폭행과 살인을 저질렀다. 그런 5차 사건까지도 이 사건이 연쇄살인이라는 점을 경찰은 인지하지 못했다. 수사본부가 설치되고 대대적인 수사가 진행됐으나 연쇄살인의 고리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부족했다.

대규모 수사 때문인지 이춘재는 한동안 범행을 멈췄다. 화성의 사람들도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갔으나 1988년 올림픽을 열흘 앞둔 9월 7일 또다시 여성이 살해됐다. 오랫동안 참은 갈증을 폭발하듯 이춘재는 한층 더 잔혹하게 범행했다.

중학교에 다니던 14살 여학생을 살해한 9차 사건은 피해자의 물건으로 그 신체에 참담한 상처를 입히는 등 잔혹성으로 사람들의 치를 떨게 했다.

1991년 4월을 마지막으로 현재까지 공식 확인된 ‘이춘재 사건’의 범행은 멈췄다. 무슨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렇게 수십년이 지나갔다. 그 사이 마지막 사건의 공소시효도 2006년 만료됐다. 이춘재 사건은 영원히 해결 못 할 미제로 남는 듯했다.

19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경기남부지방경찰청에서 반기수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장이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출처: 연합뉴스)
19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경기남부지방경찰청에서 반기수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장이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출처: 연합뉴스)

◆과학수사, 한 줄기 빛 찾다

사람들은 진실을 향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영화 ‘기생충’으로 올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2002년작 ‘살인의 추억’ 등이 제작되며 잊지 않기 위한 시도는 이어졌다.

이 노력의 결과는 과학수사가 발전되며 빛을 발했다. 경기남부경찰청은 지난 7월 이춘재 사건의 현장 증거물 일부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보내 DNA 분석을 의뢰했다. 그중 한 피해 여성 거들에서 DNA가 검출됐고, 국과수의 데이터베이스에서 그 주인을 찾은 결과 이춘재의 DNA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사실은 경찰 발표보다 먼저 언론을 통해 9월 18일 알려졌고, 경찰은 이튿날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를 특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경찰은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돼 진범을 처벌할 수는 없지만,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인 ‘실체적 진실의 발견’을 위해 수사를 완료하겠다고 천명했다.

서술했듯 진범은 바로 이춘재였다. 시그니처 등 다른 이춘재 사건과 비슷한 방법으로 처제를 잔혹하게 살해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그는 부산교도소에서 모범수로서 언젠가 있을 가석방을 꿈꾸며 착실히 지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춘재 사건의 범행이 수십년 동안 멈춰 있었던 것이다.

같은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이 사건에 대해 “범인은 다른 사건으로 오래전부터 교도소에 수감돼 있거나 이미 죽었을 것”이라며 “살인 행각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라고 예상한 적이 있는데, 그 예상이 들어맞았다.

유영철은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10개월여 동안 출장마사지사 등 21명을 살해하고 사체 11구를 암매장해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인물이다.

범인으로 특정된 이후, 처음에 경찰의 조사가 시작됐을 땐 이춘재는 자신의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다. DNA 증거를 들이밀어도 소용없었다. 그러나 언론에도 이춘재의 상황이 보도되고,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사실상 가석방의 희망이 박살 나자 혐의를 시인했다. 그는 “언젠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고 말했다.

이춘재에게 자백을 받기 위해 경찰은 9명의 프로파일러를 투입했다. 그 가운데 여성 프로파일러도 있었다. 이춘재는 이 프로파일러의 손을 쳐다보면서 “손이 참 예쁘시네요”라며 “손 좀 잡아봐도 돼요?”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프로파일러가 여성이라는 점을 이용해 도발한 셈이다.

이 프로파일러는 현명하게 대처했다. “조사가 마무리되면 악수나 하자”고 응수한 것이다. 이춘재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서도 공적 관계에서 이뤄지는 지극히 형식적인 인사인 악수를 통해 이춘재에게 입을 열 여지를 남겼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화성연쇄살인 8차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20여년을 복역한 윤모씨가 13일 오전 경기 수원시 영통구 소재 경기중앙지방변호사회관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뒤 수원지방법원에 재심청구서를 제출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11.13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화성연쇄살인 8차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20여년을 복역한 윤모씨가 13일 오전 경기 수원시 영통구 소재 경기중앙지방변호사회관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뒤 수원지방법원에 재심청구서를 제출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11.13

◆자백에 드러난 당시 불법수사

이를 계기로 말문을 연 이춘재는 이미 알려진 10건보다 더 많은 14건의 살인과 30여건의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숨겨진 추가 범죄가 있다는 점도 충격이었지만, 이미 진범이 잡혔다던 8차 사건까지 자신이 했다고 밝히면서 큰 논란이 일었다.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집에서 잠자던 박모(당시 13세)양이 성폭행 당한 뒤 살해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이춘재가 벌인 다른 사건과 유사했으나 다른 범인이 잡히면서 모방범죄로 분류됐다. 범인으로 지목된 이는 인근 농기계 수리공장에서 일하던 소아마비 장애인 윤모씨. 사건 발생 다음 해 7월 윤씨를 붙잡은 경찰은 방사성동위원소 감별법(체모 등에 포함된 중금속 성분을 분석하는 방법) 분석을 거쳐 윤씨를 범인으로 특정했다.

이춘재로 인해 과학수사의 중요성이 대두됐고, 바로 그 과학수사로 범인을 잡았다는 점에서 아무도 윤씨가 범인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법원은 오히려 국내 사법사상 처음으로 감별 결과를 증거로 채택해 윤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윤씨는 경찰의 고문 때문에 허위로 진술했다고 항소했지만 흉악범이 된 그의 말에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윤씨는 20년간 복역한 뒤 2009년 가석방됐다.

1일 오전 경기도 화성시 A공원에서 경찰이 지표투과레이더 등 장비를 이용해 화성연쇄살인사건의 피의자 이춘재(56)가 살해한 것으로 확인된 ‘화성 실종 초등생’의 유골을 수색하고 있다. (출처: 연합뉴스)
1일 오전 경기도 화성시 A공원에서 경찰이 지표투과레이더 등 장비를 이용해 화성연쇄살인사건의 피의자 이춘재(56)가 살해한 것으로 확인된 ‘화성 실종 초등생’의 유골을 수색하고 있다. (출처: 연합뉴스)

이춘재가 자백하자 윤씨는 영화 ‘재심’의 모델이기도 한 박준영 변호사를 변호인으로 삼고 지난달 13일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윤씨는 “수십년전 일의 진실이 밝혀지고 제가 무죄를 받고 명예를 찾으면 좋겠다”며 “당시 경찰은 무능했다. 하지만 지금 경찰은 신뢰하고, 앞으로도 잘해줄 것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이춘재 사건의 수사과정에서 경찰의 잘못은 윤씨의 경우뿐만이 아니었다.

1989년 7월 7일 낮 12시 30분 화성군 태안읍에서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던 초등학교 2학년생인 김모(8)양은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춘재가 이 사건도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하면서 밝혀졌다.

문제는 당시 경찰의 태도였다. 이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이 같은 해 12월 동네 주민들이 김양이 실종 당시 입었던 치마와 메고 있던 책가방 등을 발견했음에도 가족들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찾은 김양의 시신까지도 은닉했음이 최근 드러난 것이다.

결국 경찰은 8차 사건 당시 수사본부에 일했던 형사계장 등 6명을 직권남용 체포·감금과 가혹행위 등으로 17일 입건했다. 특히 형사계장은 화성초등생 사건과 관련해 사체은닉·증거인멸 혐의로도 입건됐다.

주목할 점은 당시 담당 검사도 직권남용 체포·감금 등의 혐의로 입건한 점이다. 실제 수사한 경찰에게만 책임을 물은 것이 아닌 수사 지휘를 한 검사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 셈이다.

이들에 대한 공소시효는 모두 만료돼 실체 처벌이 이뤄지지는 않는다.

이진동 수원지검 2차장검사가 23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검찰청 브리핑실에서 열린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관련 브리핑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19.12.23 (출처: 연합뉴스)
이진동 수원지검 2차장검사가 23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검찰청 브리핑실에서 열린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관련 브리핑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19.12.23 (출처: 연합뉴스)

◆8차 사건 감정 놓고 검경 대립

경찰이 주도하던 수사에 지난 11일 갑자기 검찰이 직접 이 사건에 대해 직접 수사 의지를 드러냈다. 검찰은 “재심 청구인 윤씨로부터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청하는 수사촉구 의견서를 접수받았다”고 이유를 밝혔지만, 경찰로선 아무래도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검경은 수사권조정 등을 놓고 여러 차례 대립해 왔던 터다.

이런 분위기는 윤씨의 국과수 감정 결과를 놓고 이어졌다. 검찰은 12일 국과수 감정서가 ‘조작’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17일 오전 경찰은 조작이 아닌 중대한 ‘오류’가 발생했다고 검찰 발표를 정정했다. 하지만 바로 그날 오후 검찰이 경찰의 발표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경찰은 이에 질세라 그 이튿날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검찰의 설명이 사실과 다르다고 재반박했다.

핵심은 윤씨를 범인으로 특정하게 된 방사성동위원소 감정 결과가 국과수의 단순한 오류인지, 아니면 조직적인 조작인지 여부다. 현대 과학기술의 승리로 실마리가 풀린 이춘재 사건이, 과학수사 결과가 제대로 됐는지를 놓고 다시 미궁에 빠진 것이다.

잘못이 드러나긴 했지만, 이춘재의 정체를 밝혀낸 건 한국 수사 역사상 엄청난 쾌거였다. ‘살인의 추억’에 출연했던 배우 김상경은 이춘재의 범인 특정 소식을 듣고 “살인의 추억 개봉 당시 인터뷰에서 지나간 미제사건을 굳이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기억하는 것 자체가 응징의 시작’이라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며 “이제 응징이 됐고 끝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춘재 자신만의 비밀로 음미하던 살인의 추억은 이제 끝났다. 많은 이들이 끔찍한 살인을 기억하고 물고 늘어진 결과 실체적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날이 발전하는 과학기술과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면 이춘재뿐 아니라 앞으로 더 많은 범죄자의 추억은 끝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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