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한국의 대표적 문화유적 원림(園林)은 호남에 있다. 바로 전남 담양의 ‘소쇄원(瀟灑園)’이다. 원림이란 자연을 그대로 조경 삼아 주거공간을 배치한 형식이란 뜻이다. 그러나 소쇄원에 담긴 뜻은 정경의 그윽함보다는 다른데 있다. 옛 선비의 대쪽 같은 품성과 절의가 담겨 있는 것이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의 제자 양산보(1503~1557)가 출세에 뜻을 버리고 내려와 이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그는 소쇄원을 마련하고 학문을 연구하며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소쇄원을 사랑한 선비 가운데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우뚝하다. 그는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리에서 사람이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인 장성으로 낙향, 성리학 연구에 정진했다. 이 분이 바로 송강 정철의 스승이다.

대쪽 같은 성품의 송강이 가장 존경한 학자가 바로 하서다.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 송강은 통곡하며 하서를 그리는 시를 적었다.  

동방에는 출처 잘한 이 없더니/홀로 담재옹만 그러하셨네/통곡 소리 온 산에 가득하였네. - 하서를 그리며 (東方無出處  獨有湛齋翁  年年七月日  痛哭萬山中 - 懷河西 )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소쇄원 48영(詠)은 바로 하서가 지은 것. 송강은 하서로부터 풍류를 터득하고 자연 사랑을 배운 것인가. 그도 스승을 닮은 탓인지 임금에게까지 올바른 소리를 하다 여러 번 고초를 겪었다. 이 시기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은 호남 출신 학자로서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다. 학문과 문장 절의가 뛰어나 삼절(三絶)로 불렸다. 고봉과 퇴계가 주고받은 사칠논쟁(四七論爭)은 유명한 유학사의 사건이다. 이 논쟁 때 퇴계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고 고봉의 견해를 따르면서 ‘광대한 근원을 아는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호남이 배출한 영웅들이 어디 이뿐인가. 임진전쟁이나 국난 시에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나와 선두에서 싸우다 산화했다. 임진전쟁 때 의병장 김덕령은 광주출신으로 용맹을 날렸으나 모함을 받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 동학혁명의 발원지요, 일제에 항거한 6.10만세사건의 진원지였다. 

호남의 많은 인사 가운데 강진에서 17년간 귀양살이를 한 다산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불후의 명저들을 많이 저술했는데 그중 가장 주목 받은 것이 목민심서다. 백성을 다스리는 요목을 지은 이 지침서는 지금도 공직자들이 취할 것이 많은 내용이다. 

호남은 예향(藝鄕)이기도 하다. 강진 부안 청자유적, 고창 선사유적은 세계적 문화유산이 아닌가. 서양화가 오지호, 한국화의 대가 의재, 남농이 살던 무등산엔 지금도 묵향이 살아 있다. 어디를 가나 판소리, 흥타령을 들을 수 있는 고장이다. 그래서 필자는 호남지역에 예술가 친구들이 많다. 이들은 정이 많고 의리가 있으며 기개가 있다. 

그런데 새 정부 들어 극명하게 현 정부를 무조건 지지하는 풍토가 생겨났다. 여론 조사에서도 80% 이상의 지지율을 보인다. 야당은 현 정부를 가리켜 ‘전라도 공화국’이라고 까지 볼멘소리를 한다. 정도를 잃은 정치가 영-호남을 가르고 민심을 이반하게 만든 것인가. 

광주에서 이례적으로 현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무조건적 지지를 하는 일부 호남인에게 자성을 촉구하는 모임이 열렸다. 광주시민과 출향 인사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민국 발전 호남인 광주선언’을 한 것이다. 정부의 잦은 실정(失政)이 눈에 띄어 이번 ‘광주선언’을 준비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바르지 못한 정치를 보고도 눈을 감는 것은 방관이자 조력자다. 호남의 역사는 비리나 불의를 용서하지 않았다. 절의의 본향 호남이 바로 서야 한국이 바로 선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