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영국정치는 여전히 보수와 진보를 상징하는 거대 양당체제가 군림하고 있다. 물론 기존의 이념적 잣대 보다는 매우 약화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이념이 앞선다. 보수지만 더 진보 쪽으로, 진보지만 더 보수 쪽으로 당의 체질을 바꾸고 또 바꾸다 보니 이젠 두 거대 양당은 서로 너무도 가까이 다가서버렸다. 두 정당의 경계선마저 모호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이념적 중간영역으로의 수렴, 영국의 정당정치는 그렇게 진화한 셈이다.

그렇다면 거대 양당체제가 지금 이 순간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선거정치에서 여론을 좌우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영국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처럼 기득권 양당체제에 반기를 든 신생정당 또는 제3지대 정당의 급부상과는 아직은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 이유는 영국 정치의 오랜 ‘전통성’과 정치적 ‘안정성’ 그리고 유권자의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당의 체질을 개선하는 ‘혁신성’의 산물로 이해된다.

이런 점에서 지난 12일 치러진 영국의 총선은 사실 큰 이변으로 볼 수는 없다. 선거결과를 보면 보수당이 47석을 더 얻어 365석을 차지했다. 과반의석(326석)을 훌쩍 뛰어 넘는 압승이다. 보수당만으로도 단독정부를 구성할 수 있게 됐다. 반대로 제1야당인 노동당은 무려 59석을 잃어 203석을 얻는 데 그쳤다. 노동당 역사상 84년만의 완전한 참패다. 그 다음으로 스크틀랜드국민당(SNP)이 13석을 더 얻어 48석을 차지했다. 스코틀랜드에 할당된 의석 대부분을 차지함으로써 앞으로 스코틀랜드 독립의 새로운 동력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 밖의 자유민주당 등은 의미 있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영국의 이번 총선은 역시 브렉시트(Brexit) 문제가 최대 이슈였다. 이 문제를 풀기위해 존슨(Boris Johnson) 총리가 작심하고 ‘조기 총선’ 카드를 뽑아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보수당과 존슨은 브렉시트 문제에 대해 간결하고 강력한 의지를 밝힐 수 있었다. 한마디로 브렉시트를 단행하겠다는 것이다. 존슨이 직접 유명 영화의 한 장면을 패러디한 영상에 출연해 선거운동에 나설 정도였다. 물론 표절 시비가 붙긴 했지만 100만회 이상의 조회를 보였을 정도로 존슨의 의지만큼은 유권자들에게 확실하게 전달된 셈이다.

사실 영국 유권자들은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지난 3년 반 동안 정치권의 끝없는 대치와 소모적 논쟁 그리고 오락가락하는 전망 때문에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국민 여론까지 브렉시트 찬성과 반대로 양분 되면서 영국정치는 한걸음도 나아가질 못했다. 그 사이 캐머런(David Cameron), 메이(Theresa May) 총리가 물러날 만큼 정치권 전체가 혼란 그 자체였다. 영국의 희망은커녕 영국의 절망을 보고 있다는 우려가 세계 곳곳에서 쏟아졌다. 그럼에도 영국의 집권 보수당은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길을 제시하지 못했다. 브렉시트 연장이나 재협상 또는 이를 위한 영국 의회 내부의 법률안 처리 등에 연연하면서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물론 그 마저도 대부분 노동당 등 야당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보수당 내부의 반발로 일을 망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영국의 의회정치는 그렇게 무너졌으며 지난 몇 년 동안은 사실상 영국 정치는 거꾸로 갔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보수당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제1야당인 코빈(Jeremy B.Corbyn)의 노동당은 무엇을 했을까. 간략하게 표현한다면 ‘반대’하고 ‘비난’하는 데만 몰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브렉시트 문제에 대한 ‘대안’은커녕 진지한 논의조차 외면하기 일쑤였다. 길거리 시민들을 선동하거나 보수당 정부에 대한 무책임한 정치공세에 열을 올렸을 뿐이다. 영국정치의 위기도 집권당 탓이요, 브렉시트 혼란도 모두 집권당 탓으로 돌렸다. 심지어 브렉시트에 대한 입장마저도 그때그때 달라질 만큼 명확하지 못했다.

이 뿐이 아니다. 브렉시트 재투표와 조기총선에 대한 입장도 오락가락 했다. 도대체 이런 정당이 영국정치에 무슨 필요가 있는지 물어봐도 아마 노동당은 명확한 답변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영국 노동당은 근래 보기 어려울 정도로 최악의 행태를 보였다. 그 결과 존슨 총리가 꺼내든 조기 총선 카드에 노동당이 속수무책으로 휘둘린 셈이다. 총선 최대 쟁점인 브렉시트에 대한 명확한 입장이나 비전을 내놓지 못한 채 대학 등록금 폐지와 공공부문 노동자의 임금인상, 통신서비스 무상화 그리고 철도와 우편업무의 국유화 등 귀에 익은 진보적인 정책을 마구 쏟아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무상 정책’이라 하더라도 브렉시트 논란에 지쳐버린 영국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기엔 역부족이었다.

영국이 처한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 대신 ‘장밋빛 공약’에 빠져버린 코빈과 노동당의 패착은 결국 총선 참패로 이어지고 만 것이다. 무능한 노동당에 대한 심판은 그대로 이번 총선에서 보수당 완승으로 이어졌다. 이런 점에서 존슨 총리는 행운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일종의 ‘반사이익’인 셈이다. 노동당 외 다른 제3의 정당들도 뚜렷한 관심을 끌기 어려웠다. 보수당의 선명성과 노동당의 무능에 묻혀버렸다고 볼 수 있다.

당장 노동당은 새로운 당 대표 선출을 서두르고 있다. 코빈의 시대는 이제 비극적으로 끝났다. 아니 더 일찍 끝났어야 했다. 현실에 안주한 채 이념에 집착한 결과는 이처럼 비참했다. 앞으로 누가 노동당 대표를 맡든 당 혁신은 이제 운명이 될 것이다. 그 결과에 따라 영국의 브렉시트 논란이나 그 후속 대책까지 더 선명하게 방향이 잡힐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지긋지긋했던 브렉시스 논란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선택은 역시 간명했다. 살려야 할 것은 살렸고 죽어야 할 것은 죽게 만들었다. 이 또한 ‘민주주의의 힘’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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