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백제 초기 첫 거점 임진강 육계토성

삼국의 쟁패지 국난극복의 역사로 점철

칠중성 정상에서 파주 육계토성을 내려다본 모습
칠중성 정상에서 파주 육계토성을 내려다본 모습

고대 임진강은 칠중하(七重河)로 불렸다. 일곱 번 겹쳐 흐른다는 임진강은 고대 역사에서 어떤 사연과 비밀을 지니고 있을까. 국어학자들은 임진강 이름을 재미있게 해석한다. 즉 옛날에는 더덜나루 혹은 다달나루라 하였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임진강(臨津江)이 됐다는 것이다. 임진강의 ‘임(臨)’은 ‘더덜’ 즉 ‘다닫다’라는 뜻이며 ‘진(津)’은 ‘나루’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또는 ‘이진매’ 즉 ‘더덜매’라고도 불렸다.

임진강의 발원은 강원도 법동군 용포리(龍浦里)의 두류산이다. 황해북도 개풍군 임한리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사이에서 한강 하구로 흘러든다. 임진강에 대한 백과사전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길이 244㎞, 유역면적 8897.24㎢로서 한강의 제1지류이다. 오른쪽 유역에는 아호비령 산맥이 뻗어있 고, 왼쪽 유역에는 지류들이 흐른다. 주요 지류는 강원도 고미탄천(古味呑川: 114㎞), 경기도 평안천(平安川: 81㎞), 한탄강(漢灘江: 130㎞) 등이며, 5㎞이상의 지류는 250여 개다.”

임진강은 고대 백제가 처음 개척했지만 고구려, 신라의 쟁패지였다. 백제 초기 세력은 요하에서 남하하여 처음에는 임진강에 자리를 잡으려 했다. 일부 학자들 사이에는 온조의 하북 위례성을 임진강 유역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지금의 광진구나 몽촌토성이 아니라 파주시 주월리 토성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 세력의 남하로 칠중하는 새로운 주인의 시대로 접어든다. 4세기 후반 광개토대왕의 남하 이후에는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 장수왕대 위례성이 정복당하고 개로왕이 참수당한 이후에는 백제가 부단히 한강유역을 재탈환하려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신흥 신라가 한강을 차지한 이후에는 그 의지가 더욱 꺾이고 말았다.

신라는 6세기 중반 영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장악하고 신주(新州)를 세운 후에는 더욱 중시했다. 고구려 세력을 임진강에서 몰아내는 중요 요새로 삼았다. 통일기에는 한강 하류에서 올라오는 당나라 수군을 제압하여 그 기세를 꺾기도 했다. 이 지역에서의 당나라군 제압은 675년 20만 대군을 물리친 연천 매초성 전투의 승리라는 민족사의 쾌거로 이어진다. 역사의 강이자 전장의 강, 칠중하. 지금도 한민족이 남북으로 갈려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긴장의 최전방이다.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뭇 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강 건너 갈밭에선 갈새만 슬피 울고

메마른 들판에선 풀뿌리를 캐건만

협동벌 이삭 바다 물결 우에 춤추니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는 못하리라

지난 50년대 박세영이라는 북한의 공훈 예술가가 지은 임진강 가요. 일본에서 번역되어 많이 불렸다고 한다. 오랜 시간 동안 금지곡이 되어왔던 이 노래를 지금은 한국에서도 들을 수 있다. 세상이 변한 것이다. 현대에도 반세기 넘게 한 민족을 갈라놓은 칠중하. 이 강을 마음대로 넘나들며 남북의 겨레가 마음대로 만나는 시기는 언제일까. 칠중하 주변에 있는 고대 백제 유적을 찾아 답사를 떠나본다.

육계토성은 온조의 첫 궁성지인가

파주시 적성면 주월리 육계동이라고 했다. 이곳에 매우 중요한 고대 토성지가 남아 있다. 바로 ‘육계토성’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대동지지>에는 ‘치소 서쪽 7리에 있으며 토축으로 둘레는 7692척이며 장단의 호로고루(瓠蘆古壘)와 상대한다.’고 하였으며, <적성현읍지>에는 ‘육계토성 북변 강가에 소돈대가 있었는데, 속전에는 옛 궁궐의 종을 매단 곳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파주목조 성지조에는 ‘마산고성(馬山古城)’으로 나온다. <대동지지> 기록보다는 작은 규모로 기록되고 있으나 같은 성을 가지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마산고성 서쪽으로 2리이며 백제 때 쌓았는데 선조(宣祖)조에 중수하였고 둘레는 2905척이다.”

또한 조선 숙종대 재상을 지낸 미수 허목(眉叟許穆)의 문집에도 보인다. <기언별집> 권15 ‘기행 무술 주행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날이 저물어 돛을 올리고 호로탄(瓠蘆灘)으로 올라가니 여기가 호로하(瓠蘆河)이고 그 위는 육계(六溪)이다. 또 옛날 진루(陳壘)가 있는데, 앞의 여울은 아주 험하며 사미천(沙彌川)이 여기로 들어온다. 상류에 옛 성이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대해 있는데 석벽으로 되어 있어 견고하다. (중략) 그 위의 칠중성(七重城)은 지금의 적성현(積城縣)인데 신라, 고구려 두 나라의 국경이라고 하였다(하략).”

미수는 조선 중기 학자 겸 문신이다.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아 실학자 성호 이익에게 연결시킴으로써 기호 남인의 선구이며 남인 실학파의 기반이 되었다. 그는 전서(篆書)에 독보적 경지를 이룬 명필이기도 했다.

육계토성은 학계에서 조사가 이루어져 그 제원이 소상이 밝혀졌다. 임진강 남안의 충적대지에 축조된 평지토성으로 둘레는 약 1700m이다. 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어 한강변 풍납토성과 크기나 모양이 비슷하다. 그래서 이곳을 하북 위례성(河北 慰禮城)으로 비정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토성은 동북·서남 방향에 장축을 둔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다. 즉 남북으로 뻗은 두 줄기의 긴토루(土壘)가 성 내부를 구획하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내성의 중앙부 토루는 1996년 홍수 때 파괴되었다. 외성은 옛 토성 축조방식인 판축기법이다. 동남쪽 내벽구간에서는 하부에 강돌을 이용하여 높이 1m 내외로 보강한 석축이 나타난다. 여러 시대를 거쳐 보축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서남쪽 구간의 토루가 비교적 잘 남아있는데 높이 3~5m, 너비 4~6m 정도로서 한강 몽촌토성을 닮았다.

조사보고서에는 동문지·남문지·서문지 등 3개소가 확인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물지는 동남벽과 서남벽의 안쪽에 2개소가 조사되었다. 특히 서문지 부근에는 동서로 길게 뻗은 저습지가 남벽부를 따라 성안의 중간부까지 형성되어 있으며 성 밖으로는 서쪽 강변까지 이어지는 장축 형상을 하고 있다.

또 옛날 진루(鎭樓) 터로 보이는 곳이 있다. 마을 촌로들 사이에 ‘옛날 만호(萬戶)의 진루였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수군 만호(萬戶)는 육군의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와 같이 종4품 무관직. 육계리 토성은 그 위치의 중요성으로 조선시대에까지 무관 만호와 군사들이 상주했음을 알 수 있다.

육계토성에서 발견된 백제 생활유적
육계토성에서 발견된 백제 생활유적

지난 1996년도 드러난 초기 백제역사

육계토성은 1996년 7월, 폭우로 성벽과 성내부가 쓸려 내려가면서 땅속에 묻혀 있던 유물이 무더기로 드러났다. 고고학계와 역사학계가 흥분할만한 고대 유물들이 쏟아진 것이다. 경기도박물관과 한양대박물관에서 긴급발굴조사에 나섰다.

발굴결과 성내부에서 많은 고대 주거지와 다량의 백제 유물이 출토됐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생활 유적인 온돌시설과 판재로 만든 벽체시설이 확인됐다. 특히 네 귀가 달린 광구호와 같은 고구려 토기를 비롯해 대형 항아리, 철모, 철갑 등 철제유물도 출토되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는 한강유역과 양주지역에서 발견되는 유물에 비해 시기가 빠른 것으로 해석되었다. 같은 시기 다수의 백제주거지와 함께 발견됐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되었다. 파주로 내려 온 백제 지배층이 고구려계 토기를 사용한 것인가, 아니면 이 성을 점령한 고구려인들이 만들어 쓴 것인가.

육계토성을 하북위례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는 대략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우선 두 성 모두 하중도(河中島)에 입지하고 있다 것. 풍납토성의 경우 지금은 강 반대편은 평지로 돼있지만 일제강점기 지도를 보면 성을 방어하기 위한 자연적인 해자(垓字)처럼 돼 있다. 육계토성도 이같이 물길을 따라 토성을 수축한 형태라는 것이다.

또한 두 성 인접지역에 백제 적석총이 분포하고 있는 점을 꼽는다. 풍납토성 인근에는 석촌동 고분군이 밀집돼있다. 육계토성 인근에는 학곡리 적석총을 비롯, 삼곶리·삼거리 등 모두 7기의 백제 적석총이 확인됐다. 육계토성 안에서 대규모 취락지가 확인된다는 점도 비슷하다. 육계토성 안의 건물배치 구조는 고구려 국내성 등 왕도의 수법이 반영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 주장에 선 이들은 온조왕 13년 하남 위례성으로의 이도(移都) 불가피론이 기록된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을 예로 들고 있다.

“가을 9월 말갈이 북쪽 경계를 쳐들어 왔다(三年 秋 九月 靺鞨 侵 北境云云).”

“춘 이월 말갈 적병 3000명이 와서 위례성을 포위하자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八年 春 二月 靺鞨敵 三千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云云).”

이때 온조왕은 ‘마수성’이란 성을 쌓았으며 목책을 세웠다(秋七月 築 馬首城 竪甁山柵云云). 그러자 낙랑태수가 사자를 보내 항의했다.

“우리 강토를 핍박하려고 성책을 세우니 혹시 우리 땅을 잠식하려고 도모하려는가?”

온조왕은 이렇게 응수한다.

“험한 성을 설치하고 나라를 지키는 것은 고금의 떳떳한 도리인데 어찌 이와 같은 일로 해서 수교에 변함이 있으랴? 만약 그대가 강대한 것을 믿고 강한 군사를 낸다면 소국도 또한 이 일에 대비할 따름이다.”

결국 온조는 낙랑과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왕도를 한강변으로 옮긴 것이라는 주장이다.

육계토성의 모습
육계토성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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