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김덕수

스님들의 발우공양엔 요즘의 세속인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인상적인 모습들이 남아있습니다. 먼저 발우에 자신이 먹을 만큼의 양만을 덜어 담습니다. 음식을 수저로 떠서 먹고 난후 발우에 묻어있는 음식물들을 물로 헹구어 마십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공양이 끝날 즈음에 무우짠지나 배추김치 한 조각을 남겨둡니다. 그 다음에 발우에 물을 붓고 남겨둔 반찬조각을 젓가락으로 집어 발우 안쪽에 묻어 있는 음식물들을 말끔하게 헹굽니다. 그리고는 그 발우를 깨끗하게 가신 물을 남김없이 마십니다. 그러면 공양이 끝남과 동시에 설거지도 같이 끝이 납니다.

그릇 밖으로 밥알 한 톨 기름 한 방울 나가는 일이 없습니다. 이 얼마나 절제되고 깔끔한 식사문화인가요? 이 땅에 식량이 자급되어 겨우 밥 먹고 산 지 한 세대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세기 이상의 험난하고 가난했던 여정이후 모처럼의 풍요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데 유난히도 흥청망청합니다.

지난 97년 국가부도사태에 직면하여 국제통화기금(IMF) 긴급구제금융을 받았던 당시 환경미화원들의 말씀을 취합해 보면 참으로 가관입니다. IMF사태가 나기 직전 무렵 서울시내 각 아파트단지에서는 멀쩡한 밥을 비닐에 싸서 그렇게들 마구 내다버렸다고 하더군요.

그 밥들이 하도 아까워 다들 집으로 가져와 먹었다고 합니다. 밥의 소중함을 몸으로 체험한 사람이면 차마 멀쩡한 밥을 버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무섭고도 한심한 작태가 일반화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국가가 부도에 직면할 수박에요 아무런 생각없이 한 일 치고는 그 결과는 참으로 혹독했습니다.

망해가는 부잣집은 언제나 흥청망청합니다. 그간의 아끼고 절약하는 습관은 온데간데없고 낭비에 급급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집안이 망할 수밖에요. 가세가 일어나는 집은 모든 면에 절제와 근검이 몸에 배어있습니다.

이 법칙은 언제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통용되어 왔습니다. 소비가 미덕이라는 자본주의 논리는 동양적 사고방식으로 본다면 필연적 몰락을 예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물질문명이 발달해 옛날보다 음식물을 오래도록 보관하고 저장하는 기술은 훨씬 발전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음식물이 더 썩어가고 낭비되고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아이러니입니다.

문제는 가치관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필자만 해도 청소를 하다가 밥 한 톨이 나오면 두 손으로 신주 받들 듯 소중히 다룹니다. 물론 음식물을 먹으면서 말끔히 먹는 것은 몸에 밴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자라면서 윗세대 어른들로부터 자연스럽게 밥과 음식물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배워 익힌 결과일 겁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을 만나 식사를 해보면 나이가 든 사람들도 식사예절을 도무지 모르는 모양입니다. 그러니 어린애들과 젊은이들은 더욱 심각합니다. 음식물을 지저분하게 먹는 것은 물론 후루룩 쩝쩝하면서 시끄러워 참으로 밥 먹을 기분이 안 납니다.

벌써 오래전 중학교 체육선생님께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 식사시간 학교구내식당은 시장통보다 더 시끌벅적하다고요 선생된 자로 창피하고 부끄럽다고 하시더군요. 이제는 부모님들이 자식들에게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밥상머리 예절을 다시금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밥과 음식의 소중함을 다시금 환기시키고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시켜주어야 합니다. 풍요와 여유는 검소하고 절제된 삶에 바탕합니다.

조계총림 송광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조계총림 초대방장이셨던 구산스님께서 하루는 공양간에 나타나 구석구석을 살피시는데 마침 수채구멍에 밥풀이 몇 알 떨어져 있었던가 봅니다. 스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바늘을 꺼내시더니 밥풀을 하나하나 찍어 잡수셨다고 합니다. 그 뒷이야기는 여운으로 남겨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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