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글자 뜻 그대로 하늘에 오른 용이 항룡(亢龍)이다. 용이 물속에 있을 때는 흔히 대권을 꿈꾸는 사람들을 비유할 때 쓰는 잠룡(潛龍), 물에서 뭍으로 기어 나왔을 때는 현룡(現龍)이다.

주역에 나오는 말들이다. 그런데 구만리장천의 하늘에 오른 용도 영원히 하늘에서 살 수는 없다. 하늘에 오르려 기를 써, 기세 좋게 하늘에 올라 대망(大望)을 이루었지만 거기가 영광의 절정이요 꼭짓점이다. 하늘을 휘젓고 날며 갖은 조화를 부려 우러러 보인 것도 잠시, 더 높이 올라 갈 곳은 없다. 숨 쉬고 살려면 땅으로 다시 내려와야 한다.

그렇기에 항룡은 후회(後悔)나 회한(悔恨)을 갖기 마련이다. 이를 일러 항룡유회(亢龍有悔)라 한다. 사람이 지위가 높아졌을 때 스스로 경계하고 겸손하게 처신해 후회할 일을 남기면 안 됨을 가르치는 말이다. 이 얼마나 적절히 인생의 이치를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인가.

용은 상상 속의 동물이다. 그렇기에 용을 경외하고 신령한 동물로 보는 한국과 중국 사람들이 그려내는 용의 그림은 제 각각이다. 용은 실재하지 않기에 사진이 없다. 성경에는 용을 떠올리게 하는 거대한 바다 괴물, 악(惡)을 상징하는 피조물인 리바이어던(Reviathan)이 나온다.

비늘이 즐비하고 코에서는 연기, 입에서는 불을 내뿜으며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구불구불한 뱀(Coiling serpent)이 그것이다. 공자도 이런 용을 머릿속에 상상하면서 제자들을 이렇게 가르쳤다. ‘항룡은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어 교만해지고 결국 민심을 잃는다, 남을 무시하기에 따르는 사람들이 흩어져 후회하기 마련이다.’ 사람이 권세와 부귀가 극에 달했을 때 즉 항룡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스스로 경계하고 겸손하게 처신해야 한다는 뜻이다.

성경에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After desire has conceived, it gives birth to sin; and sin, when it is full-grown, gives birth to death)라고 했다. 불교는 ‘눈에 보이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의미인 실상무상(實相無相)과 함께 제행무상(諸行無常), 무욕(無慾), 무소유(無所有)를 강조한다. 의미가 궁극적이고 심오하며 세속을 초월한 법어(法語) 같아 보이지만 항룡유회의 뜻을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옛 선비들은 숱한 난세(亂世)를 겪고 살면서 ‘분수를 알고 만족할 줄 아는 삶, 안분지족(安分知足)’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했다. 안분지족이야 말로 동서양의 모든 생활철학을 관류하는 최고의 지혜다. 어찌 개인적인 처신이나 생활 철학에만 그치랴... 정치 안정과 사회 평화가 안분지족에서 비롯되는 것 아닌가.

임금은 용이다. 하늘에 오른 항룡이다. 그래서 임금의 자리를 용상(龍床), 임금이 입은 옷은 용포(龍袍), 임금의 얼굴을 용안(龍顔)이라 했다. 임금의 자리는 이렇게 높고 존귀한 자리다. 대신 그 만큼 더 외롭고 불안하고 위험한 자리다. 모든 임금들이 권력을 가진 채로 죽는 것은 그 높은 자리에서 무사히는 범부의 자리로 되돌아오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웅변한다. 역성(易姓) 혁명을 주장했던 맹자는 말했다. ‘증자가 말하길 경계하고 경계해야 한다. 너에게서 나온 것은 다시 너에게 돌아간다 (增資曰 戒之戒之 出乎爾者 反乎爾者也, 증자왈 계지계지 출호이자 반호이자야)’라 했다. 이 말은 범부들을 겨냥하고 있지 않다. 바로 임금의 자리와 같이 높은 자리에서 군림하는 파워엘리트(Power Elite)들에 대한 경고였다.

권력을 전횡한 교만한 임금의 추락은 비참하다. 두고두고 비웃음거리가 될 뿐 아니라 심심풀이로 회자되는 범부들의 얘기 거리로 남는다. 차라리 이름 없는 범부의 삶이 행복하고 낫다.

부르터스의 배신의 칼에 찔려 죽은 로마의 황제 시저, 고구려와의 안시성(安市城) 싸움에서 양만춘(楊萬春)장군의 화살에 애꾸눈이 된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 프랑스의 시민혁명에 의해 단두대(Guilotine, 기오틴)에서 목이 잘린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스토리는 다 그런 것들이다.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Tsar,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집무실에 들이 닥친 볼세비키 혁명군의 총검이 목을 겨눌 때에야 모든 것이 끝장인 것을 알았다.

어찌 왕들의 얘기뿐이랴. 현대사에서도 600만 명의 유태인을 인종 청소하고 세계 2차 대전의 불을 지핀 히틀러는 권총 자살로 최후를 마쳤다. 그의 동지 이탈리아의 무쏘리니는 저잣거리에서 목이 매달렸다. 북한 김일성의 친구이자 루마니아 인민의 아버지라던 사회주의자 체우세스크도 그의 부인과 함께 성난 시민에 의해 공개 효수(梟首)됐다.

지금도 여전히 심판 받아야 할 나쁜 권력은 상존한다. 권력 앞에서 항룡유회의 교훈쯤은 헛소리에 불과한가. 그러나 그들은 무너져 간다. 국민을 억압하고 민생을 외면하며 언론에 재갈을 물리면서 암흑 통치에 매달렸던 부패한 장기 집권의 절대 권력자들이 유행처럼 추락한다. 혁명은 지중해 연안 아프리카의 튀니지에서 출발했다. 이웃 이집트의 무바라크도 무너졌다. 우리로부터 멀리 또는 지근거리에 있는 독재 권력자들도 벌벌 떤다. 누가 다음 차례가 될지 대충 짐작이 간다.

우리는 이미 겪었다. 많은 피를 뿌렸다. 왜 민주주의는 이렇게 꼭 피를 먹고 자라는가. 왜 민주주의는 꽃 피고 새 우는 봄이 때맞춰 오듯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오지 않는 것인가. 권좌에 오르면 독재의 본능과 충동이 꿈틀 대고 맑았던 영혼은 오염되고 교만해질 수밖에 없는 것인가. 맞다. 그렇기에 사람을 믿고 권력을 몰아주면 안 된다. 권력은 반드시 언론의 자유의 보장과 함께 견제 장치가 있는 권력 분립의 시스템에 맡겨져야 하며 그러고서도 성숙한 시민 정신이 항시 감시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쟁취하는 일 만큼이나 지키기가 어렵다. 그렇지 않으면 도둑맞거나 짓밟히기 쉽다. 항룡유회의 교훈 한마디로 권력의 전횡이 막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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